"아직 오전이라,

엄마에게 부치지 않을 편지(3)

by going solo

슬픈 인생을 살다

외로이 세상을 등진

'J'를 기리며





아직 오전이라 아이들이 하나도 없어요. 그이와 헤어져 오빠네가 이민 가기 전에 살던 동네에 학원을 차렸어요. 큰길에서 시장으로 들어서는 골목에 약국집 건물이 있었죠? 그걸 헐고 새로 5층짜리 건물을 올렸는데 거기 3층이에요. 그 안에 원룸형으로 방도 들였고요. 가게를 얻는 것도 수리를 해서 밝고 예쁘게 꾸며 개원을 할 때까지 정서방이 도맡아 해 주었어요. 지금은 연습실마다 가지런히 문이 닫혀 남아 있는 공간에 보헤미안 랩소디가 흐르고 있어요. 앞니가 뻐드렁 한 가수가 마마를 부르고 있어요. 가슴이 오그라 들것처럼 애절한 소리로요. 노래 속의 어린 주인공은 어쩌다 사람을 죽여 놓고 두려워 떨며 엄마에게 살고 싶다고 하죠. 아 돈 워너 다이. 자기는 이제 막 삶을 시작했을 뿐이라고... 저 노래를 들을 때면 언제나 실제로 너무 이른 나이에 형장에서 삶을 거둔 한 소년의 영혼이 저 가수의 영혼에 덧 씌워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해요. 죽음 앞에서 절규하는 소년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게 하죠. 내 가슴속에서 엄마를 부르는 소리와 어쩌면 저리도 흡사할까요.


엄마,

나 아이를 가졌던 적이 있어요, 예전에.

결혼 전에 만났던 그 사람 엄마도 기억하시죠? 꼭 막내 사위 삼고 싶다며 졸업 선물로 남성용 화장품세트를 사 주셨잖아요. 사실 그 선물 그 사람에게 내밀지도 못했어요. 졸업식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거든요.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며 누구넨지도 모르는 집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그날 그 사람 부모님께 첫인사를 드리기로 했었는데.


혹시 아이가 생기기라도 할까 봐 조심조심하자더니 아무래도 재미가 없다며 그냥 했던 날은 두어 번 정도였는데 그만 내 몸속에 아이가 들어서 버렸던 거였어요. 그는 나에게 핀잔을 퍼부었죠. 미련스럽다고. 그날이 그날이면 끝내 거절했어야 했다면서요.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죠. 떼라고요. 나도 그렇게 대들었어요. 떼면 될 거 아니냐고요.

그즈음, 아이를 지우기로 결정하고 예약일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아마도 잠깐 생각을 하긴 했던 거 같아요. 나 역시 그렇게 성가시기만 했던 생명이었거늘.


솔직히 말하면 양심의 가책은 아니었어요. 질기게도 살아남았던 것이 내 운명이었다면 그렇게 떨어져 나가 버릴 것은 아이의 그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어요. 아니 내 배속에 들어 있던 것이 생명이라고 그런 생각조차 안 했는걸요. 잘 품어 고이 간직했다가 세상에 내놓으면 나처럼, 그리고 어디서나 시리도록 눈에 밟히는 저 아이들처럼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그저 어리석기만 한 내 사랑을 지켜내려는 일념뿐이었어요.


세상과 화해하고 싶다는 말은 아무래도 틀린 말인 거 같죠? 그보다 용서를 빌어야 할 것 같아요. 그 아기에게 요. 내가 엄마가 되어 났어야 했던 내 아기에게 요. 그 작고 작은 몸은 이미 오래전에 차고 가혹하게 찢겼다 해도 지금 남아 내 죽음 뒤에 있을 아이의 영혼이라도 안아보고 싶어요. 그 어린 영혼을 안고 용서해 달라고 할래요. 엄마가, 잘 못했다고요.


아, 어떤 아이가 문을 빼꼼히 열고 고개를 내밀고 있네요. 언제부터 저 아이는 저만큼 만을 들이대고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걸까, 자기가 왔는데도 아는 척을 안 해주는 선생님한테 화가 났는지 뾰로통한 얼굴을 해 자지고선. 올해 일곱 살이 된 은혜라는 여자아이인데 앞니 두 개가 나란히 빠져 웃기라도 할 때면 비어 버린 아이의 이 사이로 슬픔이 튀어나와 내 가슴을 밀려들곤 해요.

나도 이런 아이의 엄마가 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제 학원도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이번 주까지만 수업하겠다고 안내문을 보냈어요. 시도 때도 없이 기침이 나오고 각혈을 하곤 하니까. 숨 쉴 틈도 없이 기침이 밀려 나올 때면 내 살갗이 갈비뼈 사이사이로 뜯겨 들어가는 것 같아요. 죽음이라는 것, 어차피 다가올 거니까 애써 견뎌내려 마음을 다잡아먹었다가도 온몸이 비틀리는 통증이 밀려올 때면 저절로 저주가 쏟아져요. 모든 것 에게요. 세상의 모든 것 한 테요. 그러면서도 이러다가 어느 날 내 살갗은 어디로 다 없어져 버리고 앙상한 뼈만이 내 머리를 받치고 있게 되는 건 아닐까. 차라리 그러면 좋겠어요. 탈것은 다 타버리고 남은 것만으로도 이 삶을 지탱할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곤 해요. 그렇게라도 살 수만 있다면. 삶에 욕심이 나요. 그러니 매일 혼란스러워요. 어느 때는 내 마흔 해의 세월이 너무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짧게 생각될 때면 너무도 때 이른 죽음이 서럽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하고 그래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렇게 나 혼자 얘기할 수 있는 건 참 좋아요.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사람도 없고 괜스레 누워라 약 먹어라 수술은 꼭 해야 한다고 다짐을 들이대며 성가신 것 없이 그저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들을 볼 수 있어서요.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내 곁에 있다면 꼼짝없이 이토록 으스스한 죽음에 시달려야 했을 테죠. 안 죽으려고, 그럴 수도 없으면서 안 죽게 하고픈 사람들 때문에. 하지만 이쯤 되니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어떻게 죽어야 할지.


그건 도망칠 것도 아니고 달려들 것도 아니고 묵묵히 나를 내려놓는 것 그게 최선이 아닐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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