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00년에서 42년까지 로마제국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체제변화를 주도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2)가 갈리아 지역 정복전쟁의 최고 사령관으로 활약했을 때의 일이다. 기원전 53년경 갈리아 전쟁 발발 6년째, 게르만인 가운데 최강인 수에 비족과 의 전쟁 중 수에 비족은 라인강을 넘어 동쪽 끝까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라인강을 건너기 위해 목조다리를 급조하여 라인강 도하가 끝난 시점이었다.
그런데 적들이 후퇴한 지점은 배후에 바케니스라는 깊고 넓은 삼림지대가 있어 마치 자연이 만든 천연 성벽을 등지고 있는 듯한 지형이었다. 평원에서의 회전방식 전투에 능숙했던 로마군단의 취약점을 간파한 적장의 여차하면 숲으로 후퇴하여 게릴라 식 전투를 감행하려는 전략이 반영된 지형이었다. 로마군단은 더 이상 결전을 미룰 수 없는 시점이었고 마침내 수에 비족과 격돌한다.
예상대로 수에 비족은 수세에 몰리자 숲으로 퇴각하는데 그런 적에 대응하는 로마군단의 전술은 길을 내는 것이었다. 대규모 군단병이 나무를 베고 목재를 다듬어서 길을 닦아 적지를 잠식해 들어간다. 적들이 습격해 오면 이미 길을 내 시야가 확보된 지점에서 대응하는 전략이었다.
이상의 전쟁 일화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이래 600년이 지난 시점의 로마인의 도로와 혹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른바 ‘개방’이라는 키워드는 이후 로마가 주도하는 세계 평화, 이른바 팍스 로마나를 거치면서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로마제국의 정신이 된다.
(1) 로마가도, 인프라의 시조-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기원전 272년 무렵 로마는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그리스의 용장 피로스를 상대로 고전 중이었다. 두 번이나 패배를 당한 후 원로원의 분위기는 피로스가 제의한 패자입장의 강화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때 은퇴해 있던 아피우스 클라디우스가 등장했다. 로마의 명문 귀족인 클라디우스 가문 출신으로 노령에 시력을 잃어버리고 거동조차 불편한 상태의 아피우스는 남의 팔에 의지해 오랜만에 원로원들 앞에서 꾸지람에 가까운 연설을 한다. 그는 피로스가 이탈리아를 떠나는 것이 강화의 전제조건이고 우리 집 안마당에 밀고 들어와 눌러앉아있는 적은 강화든 뭐든 교섭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수세에 밀려있던 로마 입장에서 현실인식이 부족하게 들릴법한 그의 연설은 오히려 원로원의 분위기를 결연하게 바꾸어 버렸다. 로마인에게는 이 일화가 한때의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았다. 패배 중에는 절대 강화를 맺지 않고 승자의 입장에서 강화를 맺는 것이 로마의 전통이 되었고, 아피우스의 일화가 그 전통의 ‘이정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대국 카르타고를 상대로 한 2차 포에니 전쟁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겨울의 알프스를 넘어 16년 동안 로마 본토를 유린했던 한니발이 제의한 강화를 끝까지 거부한 것은 이러한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
아피아 가도에 이름을 남긴 아피우스 클라디우스는 로마식 가도의 창시자였다. 기원전 312년 아피아 가도가 착공된 후 이전까지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던 도로에 대한 ‘길은 단지 무언가를 나르며, 어디로 가는 길’이라는 인식을 넘는 사고방식에 변혁이 일어난다.
‘아피아가도(via apia)’는 아피우스의 길이라는 뜻이다. 당시 재무관이었던 아피우스가 입안하고 원로원의 가결을 받아 아피우스 자신이 총감독을 맡아서 건설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개념으로 착공될 도로의 공식적인의 종착지는 카푸아로 결정되었다. 카푸아는 당시 로마가 재패한 지역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는 도시였다. 이리하여 한 지역을 정복한 후 로마군이 그 도시의 중심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는 로마인의 통치방식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268년 베네벤토가 로마 영토에 편입되자마자 바로 연장되었고 다음에 베노사 그리고 다시 타란토까지 연장되었다. 종점인 브린디시까지 연장된 것은 이 도시가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온 20년 뒤의 일이었다. 착공에서 완공까지 무려 70여 년이 걸린 것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온 곳까지만 도로를 건설하는 방침에 따라 단계적으로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아피아 가도가 완전히 개통한 해에 아피우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