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소설〕동주의 도(道)
by going solo Oct 21. 2023
동주는 버스에서 내렸다.
큼직큼직 이쁜 눈송이는
그러려고 이 도시로 오는 것처럼
어디든 닿자마자 물이 되었다.
대한문을 지나 들어선 덕수궁엔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질척하고 소란스런 세상 어디에도
자리 잡을 곳 없어
떠돌던 고요함이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는
고궁의 길을 걷는다.
원래 역적의 집이었고
서열상 왕이 됐어야 했을 월산대군의 궁이었으며
피난길에서 돌아와
폐허가 된 자신의 도읍을 한탄하며 거처하던 선조의 행궁이었고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즉위식을 거행했던 곳이었다가
마침내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던 덕수궁의
석조전 앞에 섰다.
완공 전에 제국이 멸망하는 바람에
번듯한 이름조차 얻지 못한 전각이
말끔한 현대식 차림으로 눈을 맞고 있다.
격동의 시대 한가운데서
고난의 시간을 겪는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두려움 가득한 말들이 오가며
망과 쇠의 때를 관통해 온 것 치고는
늠름하고 담담하다.
어떤 순간에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스스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사람은
그 어느 것에도 다치지 않을 수 있다고,
피할 수도 없는데
피하고 싶은 것이 다가오면
저벅저벅 나아가 차라리 덥석 껴안아 버릴 용기가 있다고
그렇게 그 모든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단정한 차림새로
또 다른 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정전인 중화전
석어당, 죽조당, 중명당
그리고 황제가 외국 사절을 맞을 때
사용하던 덕흥전,
동주는
눈이 내리는 덕수궁의 전각을
차근차근 둘러본다.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그 모진 시간의 흔적은 다 어찌하고
이리도 단정할 수 있을까.
흐르는 시간이 고이는 곳에
예쁜 눈이 내리고 있다.
다음 글
<축복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