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 제주청년 양용찬을 기억하며

고금숙 외 8명 <우리, 나이 드는 존재>

by 평온
‘그들이 있었다’를 말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그래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그가 기억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 이라영 <우리, 나이 드는 존재> 中


이 페이지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 제주에는 11월이 되면 <양용찬 열사 추모>의 현수막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살아있는 그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죽음은 나와 무관하지 않기에 오늘은 그를 마음껏 기억해 보고 싶다.

1991년 11월 7일 저녁 7시 30분경, 당시 스물여섯 살, 청년 양용찬은 제주도 개발 반대를 부르짖으며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건물 옥상에서 분신 투신했다. 저녁 늦은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단과대 편집부에서 회지를 만들고 있었거나, 중앙로 한짓골 부근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을 테지. 그러다 투신 소식을 듣고 같이 있던 벗들과 서귀포 의료원으로 달려갔다. 어떻게 갔는지, 누구랑 갔는지의 기억은 하얗게 사라진 채, 서귀포 의료원 병실 복도에 모여 눈물 흘리던 기억만 생생하다. 공중전화 수화기 너머에 있는 엄마에게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집에 가!”라고 소리쳤으려나?


그의 죽음으로 제주도개발특별법은 대중적인 반대운동으로 번졌으나, 결국 91년 제정되었고, 지난 30년 동안 제주는 개발 몸살을 앓는 중이다. “제주가 세계의 관광지, 제2의 하와이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삶의 터전, 생활의 보금자리로서의 제주를 원한다”는 말을 남긴 그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는 오늘도 해안 바로 앞 바다뷰를 자랑하는 카페에 앉아 제주의 자연에 감탄하며 차를 홀짝이고 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연결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기억을 잃으면 그동안
나를 구성해 온 세계를 잃어버리고,
말 그대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되리라는
상상을 하면 두렵다.
- 이라영 <우리, 나이 드는 존재> 中

지난 추석에 큰애가 준 상품권이 있어 오랜만에 탑동에 있는 대형 마트에 갔다. 가을이 완연해 푸른 하늘이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그러나 가끔 이 터를 지날 때면 '그땐 그랬지'라며 예전 탑동의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중고등학교 때는 주말마다 학교에서부터 탑동까지 걸어가 바다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좌절을 비워낼 수 있었다. 대학 때는 방파제 위에 앉아 술을 마시며 '마른 잎 다시 살아나'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떼창 하며 시대의 아픔을 배설하는 곳이었다.

혼자 좋아했던 남자애에게 3개월의 계약연애를 제안했던 곳도, 방파제에 양은 밥상을 놓고 술과 안주를 팔던 리어카 옆에 앉아 술을 같이 마시다 수배 중이던 P선배가 사복경찰에게 잡혀가는 걸 손 놓고 본 곳이기도 한 나의 탑동. 하지만 나의 탑동은 지금의 탑동과는 다르다. 매년 국제관악제가 열리는 해변공연장,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농구를 하는 광장, 대형마트, 저 끝에 한창 공사 중인 호텔이 모두 그 당시에는 넘실대는 바다였다.

다시 그곳에 현재 탑동의 8배, 마라도 규모의 4배에 달하는 대규모 공유수면을 매립하고 신항만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나마 버티고 있던 해녀들의 삶의 터전이, 우리의 삶의 추억이, 많은 생명체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미 1,2차 매립으로 인해 매해 월파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고, 이번 3차 매립 시 월파 피해가 동서로 더 확장될 수 있다고 한다. (피해지로 거론된 서쪽 지역에 내 집이 위치한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얻고자 이렇듯 쉬지 않고 파괴를 일삼는 것인가? 공간은 시대를 기억하고 보관하는 장소인데, 계속 그 아카이브의 터가 사라지고, 그동안 우리를 구성해 온 세계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다 우리는 정말, 말 그대로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잊고 살아가게 되는 거 아닐까?

제주도 전체가 제2공항 건설, 각종 테마파크와 호텔 등 개발 이슈로 공동체가 찬반으로 나뉘며 와해되는 현장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대규모 토건 사업으로 인한 반짝 경제 성장 지표에 이제 그 누구도 환호하지 않음을 모르는 걸까, 알면서도 눈감고 귀 막는 것일까? 이익은 고스란히 부동산 투기업자와 대기업, 자본가들에게도 들어가고, 피해는 해녀들과 도민들이 독박 쓰는 개발 천국이 되고 있는 이 현실이, 양용찬 열사가 돌아가신 그 계절,

11월이 되니 더 안타깝고 입이 쓰다. 오늘은 소주를 마셔야 될 것 같다.

지나간 이야기를 나누며
옛 감정을 공유하는 행위 속에는
잊히고 사라져 가는 한때를
잘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 이라영 <우리, 나이 드는 존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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