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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30. 2024

성 안토니우스의 가르침

제 1장 편지와 말씀


41.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여러분이 잘 구별할 수 있도록 만물을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단단한 음식은 성숙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히브5: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의 정성 어린 수행을 통해서 선과 악에 관한 자신의 감정과 의도를 훈련해왔으며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의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나 마귀가 사람들을 유혹하지 못하도록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지혜와 분별력을 주셨습니다. 원수가 겉으로는 선한 모습을 하고 유혹하기 때문에 지혜와 분별력이 없는 많은 이들을 유혹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축복받은 성 바오로는 신실한 자에게 주신 부요한 이 통찰력을 깨닫게 되었을 때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에페1:17-18) 사도 성 바오로는 에페소 성도를 향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이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그들이 이러한 통찰력을 얻으면 그 어떤 일에도 힘들어하지 않고 그 어떤 무서움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밤낮 위로받으며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수고는 달콤한 것으로 여겨질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수도 공동체에 살고 있는 수도사와 수녀 중 많은 이들이 이 정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온전함의 정점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수도사나 수녀라는 직분은 있지만 밝은 눈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을 멀리하십시오. 그런 사람들의 공동체에 들어가면 그들은 여러분들의 정진을 방해하고 여러분의 열정을 소진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어떤 열정도 없고 그저 차가움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여러분들에게 와서 자신들의 욕구에 따라서 세상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을 이끌어 가려고 하면 절대로 이에 동의하지 마십시오.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에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1데살 5:19-20) 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헛된 대화로 성령을 소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길 바랍니다.     

42. 남자든 여자든 분별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것도 사람의 것도 다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영적인) 사람들은 하느님의 것을 좋아하고, 육체적인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하느님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든 더러운 것과 덧없는 이 세상의 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이 세상을 미워합니다. 그 영혼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 때문에 하느님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고 영혼을 먹이고 채워주며 양육하는 달콤함과 기쁨을 그들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나무가 자연의 물을 많이 먹지 않으면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그렇게 하늘의 달콤함을 받지 못하면 자랄 수 없습니다. 성령을 받고 하늘의 달콤함을 잔뜩 마신 영혼만이 잘 자라납니다.     

43.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이 태만한 상태에서 행한 모든 것에 대해 애통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이며 여러분 속에서 역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에게 돌아오는 모든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 죄를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를 입은 이들이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죄를 용서받았음을 스스로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용서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이미 용서받았던 죄에 대해서 하느님께 다시 고해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진 모든 빚을 탕감 받았던 종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습니다. 그 종은 주인에게 자비를 얻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 동료에게 악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주인은 그 종에게 이미 탕감해주었던 이전의 모든 빚을 다시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종이 자기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에게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 28:23 이하).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야의 아내와 죄를 범한 후에 예언자 나단은 이 일과 다윗이 그녀의 남편에게 행한 일을 다윗 앞에서 폭로하였습니다. 그 폭로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다윗은 그 즉시 회개하고 겸손해졌습니다. 예언자 나단이 다윗에게 하느님이 이미 그의 죄를 용서하였다고 (2사무 12:13)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를 탕감받고 나서도 그 죄를 잊지 않았고 그 기억을 후손들에게 전했습니다. 이것은 한 민족에게서 다른 민족으로, 그렇게 모든 민족의 기억 속으로 전해졌습니다. 모든 민족이 자신을 본받아서 죄를 지은 후에는 회개하고 또 용서함을 받은 후에는 그 죄에 대해서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다윗은 “제가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시편 51:15) 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하느님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너의 죄를 나의 기억에서 말끔히 씻어버리리라. 너는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이와 유사한 말씀을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십니다: “배반자 이스라엘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너에게 성난 얼굴을 보이지 않으리라. 나는 자애로우니 영원히 진노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단지 네 죄를 시인하기만 해 다오. 네가 주 너의 하느님을 거슬러 반역했고 온갖 푸른 나무 밑에서 낯선 자들에게 몸을 맡겼으며 내 말을 듣지 않은 죄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3:12-13)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 우리가 지은 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에 대한 회개를 새롭게 함으로써 그 잘못을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44. 영적 수행을 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영적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적이 있습니다. 영적 수행을 온전하게 하고 싶은 사람은 그 어떤 악한 자의 일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든 악한 것을 추종하는 사람은 온전함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4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자기를 낮추셔서 당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덮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단순히 사람일 뿐만 아니라 기록된 말씀처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요한 1:14) 던 사람이 된 하느님이셨는데, 모든 사람은 그분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처럼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했던 육신을 입은 동안에도 신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습니다.     

46. 많은 이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말을 합니다. “사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보았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자기도취와 미혹 속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주님을 보았던 것과 같이 주님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던 무리들에 둘러싸여서 이 땅을 거닐고 계실 때 주님과 함께 지내며 그를 믿었던 사도들이 주님을 본 것처럼 사도 성 바오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혈우병에 걸린 여인이 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보고 그분이 하느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 즉시로 그녀는 병에서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을 드러내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스승님, 군중이 스승님을 에워싸 밀쳐 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냐고 물으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나와서 어떻게 병이 나았는지 다 드러내어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8:45-48). 빌라도도 안나스도, 그리고 가야파도 주님을 보았지만, 그들은 사도들처럼 주님을 본 것이 아니라, 다른 무리처럼 믿음 없이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성 바오로는 마치 혈우병 걸린 여인이 믿음으로 주님의 옷을 만지고 치유 받은 것처럼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47. 사람들이 죄의 왕국에 머물기를 그치면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에 나타나시고 영혼과 육신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육체 안에 죄의 왕국이 거하면, 그 사람의 영혼은 육체 가운데 거하고 그 때문에 하느님의 형상인 빛을 모실 자리가 없으므로, 그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다윗은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그 속에서 본다는 빛은 과연 어떤 빛일까요? 이 빛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빛, 즉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 11:36)고 하신 바로 그 빛입니다. 주님은 또한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어둠의 자녀들에게는 당신의 아버지를 계시하시지 않고 빛에 거하는 빛의 자녀들에게만 계시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자녀들에게 계명을 알게 하셔서 마음의 눈을 밝게 해주십니다.      

48. 시편에 “하느님의 집까지 환호와 찬미 소리 드높이 축제의 무리와 함께 행진하던 일들을 되새기며.”(시편 42:5)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하느님 집까지 행진하던’이라는 말은 아주 오랫동안 하느님 집으로 행진했음을 의미하며, 그 영혼이 온전히 성장하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성전으로 가는 길이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지금 시편 기자의 영혼은 이미 하느님께 가까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영적으로 어린아이이므로 우리의 길이 매우 멀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에게도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네 길이 멀다”라고 말하였습니다(1열왕 19:5). 그 말씀을 듣고 그는 하느님을 뵈러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긴 행로에 대해 다윗도 “‘아, 내가 비둘기처럼 날개를 지녔다면 날아가 쉬련마는’”(시편 55:7)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그저 태평하고 무기력하고 나태한 마음으로 가서는 안 되며, 주의를 기울여 열심을 내면서 가야만 합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우리에게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라고 권한 후에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1코린 9:27)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몸 안에 있는 시간 동안에,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티모 4:7-8) 라고 말씀하신 사도 성 바오로처럼 온전함에 이르도록 합시다.     

49. 영혼이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 몸은 세 단계의 시기, 즉 유년기, 청년기, 노년기를 지나갑니다. 마찬가지로 몸속에 감춰져 있는 영혼도 세 단계의 시기, 즉 믿음의 태동기, 믿음 안에서의 성장기, 그리고 완성기를 지나갑니다. 복음서의 말씀처럼 영혼은 믿음을 가지기 시작하는 첫 번째 기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납니다. 사도 성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1요한 2:12-14).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 성 요한은 우리에게 새롭게 탄생한 믿음의 특징뿐만 아니라, 믿음의 중간기와 완성기의 특징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완성에 이르고 충만한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영적인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통과하는 세 단계를 묘사하면서 사도 성 요한은 육신의 친구들이 아닌 영적인 친구들에게 이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50. 영적인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요셉의 순결과 절제를 배워야만 합니다. 관상을 통해서 자신을 정돈하고, 모든 악한 욕망과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자기를 무장해야 합니다. 이 욕망은 욥이 “보아라, 그 허리의 힘을, 그 배의 근육을.” (욥기 40:16)이라고 말한 것처럼 교활한 원수의 강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대개 과도하게 먹고 마시는 것에 의해서 생겨나는 육체의 욕망에 대항하여 자기를 무장하고 수행하는 모든 사람은 순결하게 서 있기 위해서 엄격한 절제로 허리를 단단히 묶어야만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치게 되어 그의 몸이 약해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즉 ‘하느님을 보는 자’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창세 32:25, 32). 이처럼 정욕을 죽이거나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쇠약한 몸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쇠약한 몸은 정결한 선행을 완성하는 일에 다다를 수 있도록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몸이 쇠약해질 때 영혼은 강해지곤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단정하게 유지할 힘을 갖기 위해서 자기 몸을 홀쭉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을 억제하고 영혼의 종으로 삼으면 하느님께 적대적인 육체의 생각이 육체의 시들어짐과 함께 시들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영혼은 빛을 발하고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갑니다. 자기 몸의 모든 기관을 정결하게 하도록 애쓰는 사람은 진실한 영적 수행자입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감정을 훈련한 자이며,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그것을 억제하면서 매우 정결하게 주님의 멍에를 지는 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두 눈이 무엇이든 악한 것은 쳐다보지 않게 하고 여인을 탐욕스럽게 쳐다보지 못하도록 하며, 두 귀가 험담과 악마의 충고나 악마가 집어넣은 생각을 듣지 못하도록 하며, 자신의 입을 닫아 혀가 헛된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자신의 두 손이 자비와 구제의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 뻗게 하며, 두 발은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마태 5:41) 라는 주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데 빠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가슴과 배 때문에 타락해서 배와 가슴으로 기어 다니는 뱀처럼 땅을 기어 다니지 않도록 자신의 배와 가슴을 잘 관리합니다. 형제들이여, 이것이 수행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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