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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망한 뒤 방황의 세월을 보낸 40대 남성의 사연

지금 필요한 건 오로지 '나의 생존' 뿐

by 황준선

그 남자의 사연

41살 남성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사업을 하면서 돈을 꽤 버셨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사무실로 시작했는데 거래처가 늘면서 자연스럽게 사업 규모도 커지게 됐고, 나중에는 4층짜리 건물을 사셨어요. 집에 자동차만 4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IMF 외환위기 때, 아버지가 하시던 거래가 뚝 끊기면서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빨간딱지를 실제로 보았고, 채권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집 근처에 찾아와서 맨날 빙빙 돌아다니다가 우리 집 문 두들기고 나오라고 그랬어요.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먹고사는 게 문제였습니다. 여동생은 대학 보내고 저는 아르바이트하면서 생활비를 벌었어요. 편의점, 카페에서 일도 해보고 대형마트 매장에서 판매직도 해보고, 콜센터에서도 일해보고 사무보조로도 일해봤습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인맥도 쌓고 여행도 가고 친구도 사귀고 축구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고 자격증 취득하고 학점은행제로 학위 취득도 하고, 막 이런 걸 꿈꿨는데 28살 때쯤 갑자기 섬유근육통이 생기는 바람에 모든 게 멈춰버렸습니다.


온몸에 통증이 너무 심해서 그냥 그대로 8년을 아무것도 못 했어요. 병원도 10군데 넘게 다니면서 치료비에 검사비로만 800만 원 가까이 썼는데 환자를 이용하는 병원의 상술에 이용만 당하고 아무 효과도 못 보고 돈 낭비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스트레칭을 하면 좋아진다는 얘길 듣고 알아보다가, 그때가 블로그 시대였는데 어떤 트레이너의 재활 운동 기본이라는 영상을 보게 됐고 유명한 재활 전문가를 알게 됐어요.


온라인 강의 보고 헬스장 가서 나 혼자 운동을 해서 다행히 통증이 없어지고 몸 상태가 좋아졌는데 이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사회생활 할 수 있는 정도는 됐는데 나이가 37이 되어버렸어요. 28~37까지 9년 동안 진짜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일도 못 하고 경력도 못 쌓고 공부도 못 하고 책도 못 읽고 영화도 못 보고 연애도 못 하고 여행도 못 다니고 자격증 취득도 못 했어요.


정신 차려보니 나이가 40이 넘었습니다. 학력도 애매하고 경력도 없고 자격증도 없고, 어디다 써먹을 데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거기다가 내 여동생이 2018년에 교통사고로 하늘나라 갔습니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와 여동생의 죽음으로 충격이 건강이 무너졌고 우울증, 불안장애로 약 드시면서 집에 계시고 어머니는 당뇨 합병증이 있으십니다.


이제는 내가 부모님 먹여 살려야 되는 입장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를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화물차 운전 밖에 없어요. 화물차 운전 특징이 새벽에 나갔다 저녁 늦게 들어오는데, 돈벌이는 되지만 가정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혹시라도 부모님이 아프거나 집에 무슨 일 생기면 사무직 같은 거야 반차 쓰고 가면 되지만, 화물차 운전은 중간에 차 세워놓고 집에 갈 수도 없는 일이고 대체 근무자가 없으면 반차 있어도 못 씁니다.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빨리 돈벌이를 해서 부모님을 부양하는 게 가장 큰 문제인데, 부모님을 보살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니까요. 돈을 좀 적게 벌면서 부모님도 좀 보살피고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서 남는 시간에 공부도 하고 자격증 취득도 하고 이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참 고민입니다. 화물차 운전 안 하고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출처: unsplash

심리학자의 답변

28~37살까지의 공백기가 참 안타깝습니다.

뒤돌아보면, 집안이 망하고 생존이 위협받던 시기가 오히려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간절함으로 하나를 붙잡고 10년을 매달렸다면 그 분야에서 입지를 다진 전문가가 되셨을 겁니다. 하지만 28살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하신 걸 보면, 하나를 끝까지 파보겠다는 집요함은 조금 부족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 찾아온 전신통증증후군은, 혹시 그 고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되어준 건 아닐까요? 물론 통증은 실제였겠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쉬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화물차 운전을 생각하신 건 잘하셨어요.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하고요. 지금 상황에서는 일단 시켜만 준다면 어떤 일이든 해야 하니까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부모님을 돌봐야 해서 트럭 운전은 안 된다"는 생각이 또다시 작동하고 있지 않나요? 물론 편찮으신 부모님을 돌보는 건 당연히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질문을 한 번 해볼게요.


지금 41살인 작성자님의 인생과 부모님의 인생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고르시겠습니까?

만약 부모님을 선택한다면, 이번 생은 부모님 부양에 바치겠다고 마음먹고 사시면 됩니다. 그것도 하나의 삶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부모님 부양'이라는 명분을 머릿속에서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진심으로 물어보세요. 이게 정말 효심인가, 아니면 트럭운전수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 주는 부담감과 두려움이 '부모님을 돌봐야 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포장된 건 아닌가?


전신통증증후군은 "아픈 환자"라는 타이틀이 되었을 거예요. 30대 전성기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것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주는 방패가 되어줬을 겁니다.

출처: unsplash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IMF로 절망을 맛본 사람들이 모두 다 무너진 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집에 붙었던 빨간딱지는 과거에 묻고, 먼저 떠난 여동생은 하늘에 묻고, 부모님의 노년은 부모님께 맡기세요. 남의 속도 모르고 내뱉는 냉정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지금 작성자님이 집중해야 할 건 오직 하나, 나의 생존입니다.


44년 인생에서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았고, 빚더미에 앉지도 않았고, 범죄 기록도 없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칭찬받을 일입니다. 이제는 "나의 생존"과 직접 관련 없는 모든 것을 우선순위 아래로 내려놓으세요.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시도하고, 최소한 6년은 버텨보세요.


변명도 회피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6년을 보내면,

작성자님의 50대에는 잠시 미뤄졌던 인생의 전성기가 펼쳐질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상담을 했을까요?

이 상담에서 상담자가 선택한 접근 방식은 일반적인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 직면'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차근차근 살펴볼게요.


공백기의 재해석

상담자는 먼저 28~37살까지의 9년 공백기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과거를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했어요. "집안이 망하고 생존이 위협받던 시기가 오히려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은,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28살까지 여러 직업을 전전하신 걸 보면, 하나를 끝까지 파보겠다는 집요함은 조금 부족하셨던 것 같다"는 지적은 불편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연자가 자신의 행동 패턴을 인식하도록 돕는 거예요.


질병의 이차적 이득 지적

가장 조심스러운 부분은 "그 시점에 찾아온 섬유근육통은, 혹시 그 고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되어준 건 아닐까요?"라는 질문이었어요. 상담자는 통증이 실제였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쉬어도 된다"는 무의식적 허락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했죠. 질병이나 증상이 무의식적으로 어떤 이득을 제공하는 경우를 말하는 건데, 아픈 사람에게는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와 주변의 배려를 받을 수 있다는 거죠.


반복되는 패턴의 지적

"그리고 지금,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라는 말도 핵심이었어요. 화물차 운전을 생각한 건 현실적이지만, "부모님을 돌봐야 해서 화물차 운전은 안 된다"는 생각이 또다시 회피의 이유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죠. 상담자는 과거의 질병이 회피의 방패가 되었듯이, 지금은 부모님 부양이라는 명분이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본 거예요.

출처: unsplash

극단적 질문의 의도

"41살인 사연자님의 인생과 부모님의 인생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고르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은 잔인하게 들리긴 하죠? 하지만 이 질문의 목적은 사연자가 무의식적으로 '부모님 부양'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 있을 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한 거예요. 상담자는 두 가지 선택지를 명확하게 제시했어요. 부모님을 선택한다면 이번 생을 부모님 부양에 바치라고, 그것도 하나의 삶이라고 인정했죠.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면, '부모님 부양'이라는 명분을 내려놓으라고 했어요.


효심과 회피의 구분

"이게 정말 효심인가, 아니면 화물차 기사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 주는 부담감과 두려움이 '부모님을 돌봐야 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포장된 건 아닌가?"라는 질문이 핵심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두려움과 회피를 도덕적 의무로 위장하거든요. 효심이라는 가치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존과 성장을 포기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죠.


질병이 방패가 되는 메커니즘

상담자는 섬유근육통이 "아픈 환자"라는 타이틀이 되어, 30대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것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주는 방패가 되었을 거라고 말해요. 사연자가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질병이 자신의 현실에 그럴 듯한 핑계를 만드는 역할을 했을 수 있다는 거죠.


냉정한 현실 제시

"IMF로 절망을 맛본 사람들이 모두 무너진 건 아니다", "과거는 과거에 묻고, 먼저 떠난 여동생은 하늘에 묻고, 부모님의 노년은 부모님께 맡기세요"라는 말들은 정말 냉정하게 들려요. 상담자도 이걸 알고 있어서 "남의 속도 모르고 내뱉는 냉정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이라고 먼저 인정했죠. 하지만 지금 사연자가 집중해야 할 건 오직 본인의 생존이라는 걸 강조한 거예요.


최소한의 긍정적 재평가

상담자는 "41년 인생에서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았고, 빚더미에 앉지도 않았고, 범죄 기록도 없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라고 말해요. 사연자가 스스로를 완전히 실패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을 때, 최소한의 긍정적 재평가를 해주는 거예요.

출처: unsplash

구체적 시간 제시의 의미

"최소한 6년은 버텨보세요"라는 구체적 시간 제시는 중요해요. 41살에서 6년이면 47살, 50대 전에 마지막으로 인생을 재구축할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변명도 회피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6년을 보내면 50대에는 잠시 미뤄졌던 인생의 전성기가 펼쳐질 수 있다"는 마지막 말은, 냉정한 현실 인식과 함께 희망을 제시하는 거예요.


이 상담 방식이 필요했던 이유

결국 이 상담에서 상담자가 선택한 건 '냉정한 직면'이었어요. 사연자가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회피 패턴을 명확히 보여주고, 도덕적 명분 뒤에 숨은 두려움을 드러내며,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는 명확한 우선순위를 제시한 거죠. 따뜻한 공감도 중요하지만, 사연자가 이미 충분히 오랫동안 같은 패턴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패턴을 깨는 것이 필요했던 거예요. 냉정해 보이지만, 필요한 조언이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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