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장소 — 그때 거기
드림랜드라는 놀이공원이 있었다.
서울 근교, 가족 나들이의 대명사.
지금은 문을 닫았다.
놀이공원에는 늘 음악이 흘렀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는 계절을 가리지 않았고,
가요와 팝이 번갈아 나왔다.
바이킹 앞에서 줄을 서면서, 솜사탕을 먹으면서, 관람차 위에서...
그 노래들은 배경이었다.
누구도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 어떤 노래 한 곡이 배경에서 튀어나와 갑자기 가슴에 꽂히는 순간이 있다.
그녀 — 1993년의 스물셋
회사 동기들과 놀이공원에 왔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첫 직장에 다니던 해.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부서. 밥을 같이 먹고, 퇴근길에 같이 걸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말을 걸려고 하면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 사람 앞에만 서면 평소의 내가 아니었다.
그 시절 직장 초년생들의 이야기를 모아보면,
"좋아한다는 말을 못 했다"는 고백이 많다.
지금처럼 메시지를 보내는 시대가 아니었다.
마음을 전하려면 직접 말을 해야 했고,
말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했고,
용기는 늘 부족했다.
관람차를 타고 있었다.
둘이 나란히 앉았다.
창밖으로 서울이 내려다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관람차가 꼭대기에 멈췄을 때,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사 한 줄 — 그때 이렇게 들렸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스물셋의 그녀에게 이 가사는 바로 지금의 나였다.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
할 말이 있는데 못 한다.
괜히 웃기만 한다.
관람차 안,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한마디도 못 하고 있는 이 순간이,
이 가사 그대로였다.
관람차가 내려왔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같은 가사, 다른 귀
그 사람과는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아이를 낳고, 직장을 옮기고, 이사를 하고... 삼십 년이 지났다.
어느 날 운전 중에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왔다.
핸들을 잡은 채로 들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다시 듣는 이 가사에서,
'그대'가 바뀌어 있었다.
스물셋에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작아졌다.
지금 나이에는 다른 것들이 모두 작게만 보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 말을 못 하면 어떠리,
이 세상 어딘가에서 전쟁이 나도,
누군가 큰일 났다며 호들갑 떠는 일을 보는 것도,
지나고 보면 다 별일이 아니었음을 아는 이 나이가
문득 헛헛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덤덤해진 내가
얼굴도 흐릿한 그 남자 앞에서
작게 느껴지던 그때가 보고 싶다.
그 남자가 아닌 스물셋의 내가.
이 노래는 발표 당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재조명되면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여자 조용필이라 불리는 김수희의 곡 <애모>는
서태지와 아이들 전성기에 차트 1위를 다툰 유일한 트로트 계열의 곡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