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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4시간전

새벽의 7인: 새날이 올 때까지

딸 J의 시선



한국에서는 [새벽의 7인]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던 1975년 작 [Operation: Daybreak](“작전명: 새벽”으로 직역된다)는 미국과 체코슬로바키아가 합작 제작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군 국가보안본부(RHSA)의 수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Reinhard Heydrich)의 실제 암살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상당한 감정적 충격을 느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항거’와 ‘독립’을 주제로 하는 영화들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반드시 떠오를 만큼 긴 여운을 남겨 준 작품이기도 하다. 복잡한 마음으로 광복절을 맞게 되는 이 즈음 다시 꺼내 볼 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1942년, 나치에게 점령된 모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영국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던 세 주인공 "얀 쿠비스"(티모시 보텀스), "요제프 가비크"(안소니 앤드류스), "카렐 추르다"(마틴 쇼)는 ‘체코 출신’이라는 이력 때문에 특별한 비밀 작전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들의 임무는 나치군이 점령한 체코의 영토,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Bohemia-Moravia Protectorate)의 총독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는 것이다. 쿠비스, 가비크와 추르다는 영국 공군의 비행선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방식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 잠입하고, 서로 뿔뿔이 흩어진 채 착륙하거나 나치군을 맞닥뜨리며 초반부터 추적 당하는 등의 여러 고전을 겪은 후에야 목적지인 프라하에서 재회해 현지의 협력자들과 합류하게 된다. 





이 세 군인은 협력자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베를린 행 기차에 탄 하이드리히를 저격하려 하지만, 다른 기차가 갑자기 시야를 가리며 첫 번째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암살을 시도할 기회는 좀처럼 마련되지 않고, 영국에서 추가로 파견된 요원이 합류하며 총 7명이 된 작전 팀은 성과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조바심을 느낀다. 게다가 체코 내에 상주하는 독립군들은 히틀러의 후계자로 간주될 정도의 주요 고위직 간부인 하이드리히를 살해할 시 체코인들에게 돌아올 보복을 우려하며 작전을 취소하자는 의견까지 제시한다. 인간적 관계를 돈독히 해 온 협력자들의 희생을 각오하면서라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흔들림이 없는 쿠비스나 가비크와는 달리, 영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던 과거 헤어졌던 아내와 아들을 비밀리에 만나고 있는 추르다가 점점 작전에 대해 회의감을 보이면서, 이들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곪아 가기 시작한다.


새로운 기회를 기다리며 답답해하던 쿠비스와 가비크는 결국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단하고, 하이드리히가 교외의 주택에서 시내로 출근하는 길에 암살을 감행하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다. 결전의 날, 하이드리히가 경호 차량을 뒤에 남겨 둔 채 먼저 시내로 들어서는 의외의 행운과 함께 가비크가 그의 차를 막아서며 완벽한 암살의 기회를 얻지만, 그의 기관총이 갑자기 작동하지 않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옆에 있던 쿠비스가 수류탄을 하이드리히의 차 안으로 던지며 그에게 부상을 입히기는 하지만 하이드리히는 목숨을 건진 채로 병원에 이송되고, 요원들 모두는 작전이 실패했다는 생각에 절망한다.





분노와 자책도 잠시, 하이드리히가 상처 감염과 패혈증으로 며칠 만에 사망하며 이들의 작전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이룬다. 하지만 신뢰하는 부하의 암살에 분개한 히틀러가 피의 보복을 시작하고, 암살자들과 공모했다는 의심을 받는 마을 "리디체"(Lidice) 전체가 나치군에 의해 초토화되는 끔찍한 학살이 벌어진다. 암살자들에 대한 정보에 엄청난 양의 현상금을 내건 나치군이 수사망을 좁혀 오자 추르다를 제외한 작전 팀은 저항군을 돕는 신부님의 보호 아래 "성 시릴"(Saints Cyril and Methodius) 성당에 몸을 숨긴다. 한편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과의 연락도 끊은 채 가족과 함께 체코에 남기로 결심한 추르다는, 아내와 아이가 나치에 붙잡혀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을 이기지 못해 동료들을 밀고하기에 이른다. 


결국 영국군의 구조가 약속된 바로 전날인 1942년 6월 17일, 중무장한 나치군이 성 시릴 성당에 들이닥친다. 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작전 팀 대원들은 엄청난 양의 적을 사살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결국 적군의 화력과 숫자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씩 쓰러진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암살자들을 생포하려는 나치군이 마지막으로 남은 쿠비스와 가비크의 투항을 기대하며 그들이 숨은 성당의 지하실에 살수차 호스를 넣어 물을 채우자, 다음날인 6월 18일 새벽, 통풍구를 통해 비추는 아침 햇살 아래에서 그들 둘은 서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항복’ 대신 ‘항거’를 선택한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실화를 각색한 작품으로, 영국 왕립 공군 파일럿 출신인 앨런 버제스(Alan Burgess)가 1960년 출간한 역사서 “Seven Men at Daybreak”([새벽의 7인]이라는 제목도 여기에서 유래한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42년 실제로 결행되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 사건, 즉 "유인원 작전"(Operation Anthropoid)을 소재로 하는 만큼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배경도 작품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한다는 점에 먼저 양해를 구한다. 이 글에서는 영화 속 서사와 묘사에 치중하고자 함도 미리 밝혀 둔다.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는 내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관객을 엉엉 울게 만드는 일반적인 의미의 ‘감동’이나 끔찍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내용으로 진저리치게 만드는 ‘충격’ 효과(shock value) 없이도 어떤 고귀한 처연함과 품위 있는 신념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들이 몇몇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그중의 하나에 속한다고 여기게 된다. 영화에서 표현하는 새벽, 즉 "동틀 녘"(daybreak)이 빛을 갈구하지 않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면서 말이다.





작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두 가지 관점만 나누려 하는데, 그중 하나는 ‘평범함’에 대한 것이다. 쿠비스, 가비크, 추르다 등의 등장인물은 사실 아주 평범한 사람들로, 특히 쿠비스는 체코에 있을 당시 자신이 ‘농부’였음을 영화 초반에 밝히기도 한다.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체코 주재 독립군 동료 "안나"와의 대화 가운데, 만약 지금이 전시 상황이 아니어서 자신들이 그저 ‘평범한’ 청춘이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서로 묻는 장면에서는 보통의 젊은이들이 당연히 누렸어야 할 ‘평범한’ 일상을 빼앗긴 그들의 안타까운 현실도 반증된다. 또한 하숙집 운영이라는 명분으로 쿠비스와 가비크, 추르다 등을 돌보며 독립군 활동을 하는 "마리 이모"나 어머니와 함께 레지스탕스들을 돕는 그녀의 아들딸 역시 남달리 엄청난 용기나 능력, 혜안을 가진 것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체코 내의 독립군들은 먼 곳에서 작전을 짜고 지시를 내리는 윗선과 달리 자신의 목숨과 동료의 안위, 나치군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들”이며, 그들이 불안과 공포를 넘어서는 대단한 확신과 사명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 동료들을 배신하는 추르다 역시 지극히 평범한, 어떤 면에서는 ‘타당한’ 이유에 의해 행동하는 인물이다. 고향에 두고 떠나야 했던 가족을 깊이 염려하는 추르다는 - 물론 실제 역사 속 카렐 추르다는 훨씬 더 비겁한 인물이었던 듯하지만 - 어찌 보면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로도 불릴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는 지극히 ‘옳고’ ‘당연한’ 그의 마음이,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살 수 없는" 폭력과 탄압으로 억눌린 세상에선 도리어 ‘배신’과 ‘죄’로 이끌어진 요소가 되었다는 사실에 비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적으로는 영화 속 추르다가 ‘이해’되는 부분이 있음에도 진심으로 그를 ‘옹호’할 수 없는 까닭은, 결국 그가 지극히 ‘평범한’ 선의와 의로움, 어느 누구라도 각오해야 했을 최소한의 이타심과 정의감마저 포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항거 운동을 위해 군사 훈련까지 받았고 한때는 가족들의 곁도 떠났을 만큼 나름의 희생과 노력을 쌓았던 추르다는 ‘자신’의 안위, 다시 말해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과 평안을 타인의 그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변절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런 반면,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자신’과 ‘자기 사람’들의 안위보다 타인, 더 정확히는 ‘공동체’와 ‘사회’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지켜 낸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이 있는데, 영화 초반 잘못된 장소에 착륙한 뒤 나치군에게 쫓기던 쿠비스와 가비크가 채석장에 숨어들었다가 현지 남성 두 명과 맞닥뜨리는 짧은 장면에서이다. 이 두 남성은 처음엔 쿠비스와 가비크를 쫓는 나치군들이 마을에 해를 끼칠 것을 염려하며 이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하지만 막상 주인공들을 추격하는 나치군이 등장하자 그들의 정체를 알리지 않고, 심지어 그중의 한 명은 친분이 있던 나치군과의 관계를 이용해 그에게 뇌물을 건네며 착륙 중 부상을 입은 그들이 도시의 병원까지 차를 타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한다. 이름도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이 두 인물이 유달리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정의를 각자의 자리에서 이루어 낸, 말하자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작지만 고귀한 무언가를 보여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선의와 친절을 보여 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마침내 혁명과 변화의 거대한 흐름이 만들어진 것일 테고 말이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주제는 ‘약탈자’의 ‘추함’과 ‘하찮음’인데, 이 작품의 연출 방식에서 그 요소들이 특히 잘 표현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멋’지고 ‘세련’된 나치군의 예복, 나치군의 상징물(regalia)를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처럼 비추고, 하이드리히는 호화로운 저택에서 집사들과 하인들의 정성스러운 시중을 받으며 마치 갑옷처럼 군복을 차려입는다. 권력과 부유함을 몸에 두른 하이드리히를 보고 있으면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권력자와 승자들의 행보를 ‘옳은 길’, 혹은 ‘합리적인 길’처럼 여기고 추앙하는지 어느 정도 납득되기도 하지만, 영화는 곧 하이드리히가 그저 전리품으로 그 부족함을 가리는 약탈자일 뿐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유서 깊은 성당에서 치루어진 나치 장교의 결혼식에서 하이드리히는 성당의 아름다운 조각품과 성물들을 그저 뜯어내어 가져갈 ‘약탈품’ 정도로 취급하고, 성당에 전시된 역사적 유물인 왕관을 직접 쓰며 마치 자신이 그 왕관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인 양 뽐낸다. 자신들이 점령한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 "보헤미아-모라비아"라는 이름을 새로 붙인 것도, 하이드리히의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리디체" 마을을 없애고 지도에서 그 이름을 지우려 한 것도, 어떤 지역과 사회의 고유한 이름과 정체성, 자치권을 빼앗고 통제하려는 ‘약탈’적 사고의 연장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훔치고 약탈하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고 억압하여 ‘가짜’ 권력과 명성을 쌓아올린 무도한 세력의 말로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 하이드리히에게 부상을 입힌 것은 쿠비스가 던진 수류탄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하이드리히가 타고 있던 ‘고급’ 차량 덮개의 말 털이 그의 혈류에 들어가 일으킨 감염이다. 체코 의료진에게 신속히 수술을 받는 대신 히틀러가 보낸 의사를 기다리느라 치료가 지체되었다는 사실 또한 하이드리히가 자신의 ‘힘’과 ‘옳음’의 증거처럼 여겨 왔던, 약탈로 이루어 낸 ‘사치’와 ‘호사’, 그의 권력과 위치가 결과적으로 그를 파괴하게 되었다는 시사로 해석할 수 있다. 얼마 전만 해도 하이드리히가 정성스러운 시중을 받던, 나치의 상징물들이 자랑스레 전시되어 있는 바로 그 방에서 시종들이 그의 시신에 억지로 - 그리고 함부로 - 옷을 입히는 장면에서는 하이드리히와 그가 대변하는 세력 모두가 그저 우습고 하찮게만 보여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재미있게 느끼게 된 영화 속 설정이 하나 더 있는데, 등장인물 중 체코인들은 영어를 쓰고 나치군들만 독일어를 쓴다는 점이다. 물론 외국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영어권 관객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영어를 쓰는 비현실적(?) 설정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부분이지만, 이 작품에서 ‘언어’가 특히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언어라는 요소가 ‘정체성’과 직결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인, 정확히는 아리아인(Aryan)을 ‘이상’으로 삼으며 다른 민족들은 ‘인간 이하’의 종족으로 취급했던 나치들이 자막이 필요한 독일어, 그러니까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를 쓰도록 한 설정은 권력자의 언어를 쓰지 않으면 ‘야만인’(barbarian) 취급을 하던 승자들의 논리를 비틀고 뒤집기 위한 방식이리라 짐작된다. 주인공들과 체코 독립군이 현실성과 관계없이 영어를 쓰며 관객들의 무의식에 ‘우리 편’으로 각인되는 반면, 나치들의 독일어는 이방인, 나아가 소통과 교감이 불가능한 ‘야만인’으로 그들을 인식시키는 장치가 되고 있는 것이다. 빼앗은 부와 권력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자들이 아무리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해도 그들은 인류의 기준과 공감에서 벗어난 이방인(the other), 신뢰와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는 ‘약탈자’임을 시사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의 약탈과 억압이 상흔은 남겼을지언정 결국 영원하지 못했음도 확인시켜 준다. 나치군이 지은 "보헤미아-모라비아"라는 보호령의 이름은 사라진 반면 체코슬로바키아는 여전히 존재하며, 그들이 지도에서 없애려던 "리디체" 마을은 복구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그 이름이 기념되고 있다. 직접 쌓아 올린 전통과 유산 없이 약탈과 탄압으로 힘과 영향력을 세우고 자격 없는 위치에서 지배하려 드는 세력은 결국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려 가듯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격려로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악과 죄가 점령한 듯 보이는, 강자의 논리가 진실처럼 포장되는 세상을 사는 지금 모든 이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진리이기도 하다. 광복절을 기념하는 취지가 무색하게도 여전히 약탈자의 논리를 되풀이하려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여러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평범한’ 사람들의 힘을 다시 한 번 믿어 보려 한다. 역사의 의인, 영웅으로는 기록되지 못할지언정 악인, 변절자로는 남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양심과 정의, 용기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결국은 약탈자의 ‘야만적’ 언어를 밀어내리라 확신한다.   




엄마 C의 시선



그 원 제목을 “작전명, 새벽”이라는 말로 직역할 수 있을 영화 “Operation Daybreak”는  미국과 체코슬로바키아(당시의 국가명)의 합작으로 제작되어 1975년 개봉된, 그리고 한국에서는 “새벽의 7인”이라는 제목으로 다음 해인 1976년 9월 개봉되었던 작품입니다. 한국어 제목이 그렇게 붙여진 이유를 의역 때문으로만 짐작하고 있다가 이번 글을 준비하며 영국 작가 앨런 버제스(Alan Burgess)가 쓴 “Seven Men At Daybreak”라는 역사소설의 제목을 직역해 개봉한 일본 영화의 사례를 그대로 따라 했던 것임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 시작 부분에 자막으로 명기되고 있듯 실화를 근거로 제작된 이 작품은, 독일의 체코 지배를 정착시킨 원흉이자 여러 개의 거창한 직함(SS 고위관부, 국가보안본부 본부장, 국제형사경찰기구 위원장 등)을 갖고 있던 나치의 거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의 암살 작전인 –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와 영국군 특수작전사령부가 공동 기획한 – “유인원(類人猿) 작전(Operation Anthropoid)”을 영화로 제작한 것입니다. 


히틀러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하이드리히는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유태인 130만 명 포함)을 무차별 총살과 가스 살상으로 살해한 특수부대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을 직접 지휘했으며, 나치당에 대한 저항을 체포, 추방, 살해 등의 방식으로 무력화시키는 임무를 띤 “SS 국가 지도자 보안국”이라는 정보 기관의 설립 책임자이기도 했을 만큼 나치 정권 내에서도 특히 악랄하고 극악무도한 인물로 손꼽혔다고 합니다. 히틀러 뺨칠 만큼 냉철한 성격과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여 “홀로코스트”의 주요 설계까지 담당했던 그를 히틀러가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로 불렀다고도 하지요. 영국 연합국 측에서 상당히 위험한 인물로 여기던 그의 암살 기획 작전이 워낙 극적인 스토리여서인지, 히틀러의 미친 인간(Hitler’s Madman),” “사형집행인도 죽는다(Hangmen Also Die),” “앤트로포이드(Anthropoid),” “철의 심장을 가진 남자(The Man with the Iron Heart)” 등등 이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들이 상당수에 이르기도 합니다.  





영화의 시작은 실제 사실과 마찬가지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 당시 영국에 망명 중이던 – 선발한 “얀 쿠비스(Jan Kubiš),” “요제프 가비크(Jozef Gabčík),” “카렐 추르다(Karel Čurda)” 등 세 사람의 군인들(암살단)이 1941년 초겨울의 이른 새벽 영국 공군기로 체코 영내에 낙하해 프라하까지 잠입하는 장면으로 펼쳐집니다. 대학교수인 “야낙(Janák),” 주부인 “마리(Marie),”, 그녀의 아들 “아타(Atá)”와 딸 “잉드리시카(Jindřiška),” 젊은 처녀 “안나(Anna)” 등 프라하에 거주하는 레지스탕스의 도움을 통해 그 지역에 정착한 얀과 요제프가 시내의 지형지물을 익히는 동시에 하이드리히의 주변을 감시하며 암살 계획을 세우는 사이, 무전 통신의 임무를 맡은 카렐은 아내가 살고 있는 고향집으로 내려가 전쟁으로 헤어졌던 아내, 그 사이 태어난 아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습니다. 얼마 후 하이드리히가 베를린에 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은 총으로 사살하기 위해 기차 역사 안의 창고에 숨어 기다리지만 결정적 순간 반대편 선로를 지나는 열차가 목표물을 가리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지요. 이렇게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영국에서는 이들의 작전에 가세할 특공대원 5명을 추가로 그곳에 파견합니다.


속수무책의 상황에서 시간이 흐르다 어느덧 성탄 전야가 되는데, 하이드리히를 유럽 지역 나치 제국 식민지의 총책임자로 임명한 히틀러가 그를 다시 베를린으로 불러들이자 그 이전에 임무를 완수하려는 대원들은 급박해진 상황으로 적잖이 당황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완벽하게 일을 처리할 방안을 강구하던 그들이 결국 결정한 거사 방식은 큰 위험을 무릅써야만 가능한, 늘 같은 시간에 같은 길로 출근하는 하이드리히를 아침 출근길의 인파 많은 대로에서 공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첫 번째 시도 때와 마찬가지로 직접 임무에 투입된 얀과 요제프는 하이드리히의 차가 속도를 줄일 커브 길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예상 대로 속도를 줄인 차가 커브 구간에 들어섰을 때 차 앞을 가로막으며 뛰어든 요제프가 하이드리히에게로 급히 총구를 향하지만 허술한 스테 기관단총이 격발되지 않자 반대편에서 대기하던 얀이 그를 향해 수류탄을 던집니다. 





현장에서 살아남아 병원으로 옮겨졌던 하이드리히는 일주일 후 패혈증으로 사망하는데, 118분의 러닝타임 중 중반에 해당하는 69분 시점 일어난 그의 죽음 이후 상황들이, 암살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앞부분 못지않게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로 채워집니다. 천재일우의 행운으로 얀과 요셉은 현장을 벗어나 은신처인 마리의 집으로 돌아오지만, 대대적 보복 작전을 펼치는 나치 본부는 ‘암살범’들의 활동 무대로 추정되는 리디체(Liditz) 마을에 군 병력을 보내 남성들 모두를 사살하고 여성들은 집단수용소로 보낸 후 – 아이들은 ‘정신 재교육’을 위해 독일인 가정으로 보내지고 – 마을 자체를 지도에서 없애 버리겠다며 건물들을 남김없이 폭파시킵니다. 암살자들과 관련해 100만 마르크라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내걸리고 그들을 숨겨 줄 경우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사형에 처하겠다는 공고가 나붙으면서, 처음부터 어딘가 확신이 없어 보이던 카렐은 거액의 현상금과 가족의 안위를 지키는 쪽을 선택하며 동지를 배신한 채 게슈타포에 그들의 신상을 알립니다. 





중고교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시절 처음 보았던 당시의 큰 충격과 강렬한 인상으로 저의 뇌리에 특별한 영화 중 하나로 남겨진 이 작품은, 조마조마한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데이빗 헨첼(David Hentschel)의 주제음악과 더불어 글자 그대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하이드리히 암살 장면의 긴박감은 물론, 카렐의 밀고로 마리와 그녀의 남편이 - 아내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전혀 몰랐던 - 체포되는 현장을 목격한 그들의 딸 잉드리시카가 오빠(아타)를 집에 오지 못하게 하려고 바이올린 연습 중인 음악학교로 찾아가는 장면 이후의 긴장과 안타까움으로 인해서도 더더욱 잊혀지지 않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동생이 도착하기 직전 학교를 떠나 먼저 집으로 ‘와 버린’ 아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게슈타포들의 구타와 고문에도 끝까지 비밀을 지키지만, 동료들의 은신처까지는 알지 못하던 카렐이 찾아와 묻자 그의 배신을 모르는 채 대원들이 숨어 있는 성당의 위치를 가르쳐 주지요.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으면 ‘간발의 시간차’로 7명의 귀한 생명이 산화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비통과 탄식을 금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성당에 숨어 있던 얀이 리디체 마을에서 학살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한 보복 행위였기에 – 고해성사를 했을 때 그들을 숨겨 주고 있던 “페트렉(Petrek)” 신부가 그의 말이 틀렸다면서 건넨 “가장 큰 악(the greatest evil)은 전쟁이기에 전쟁에서는 그 누구도 악한 상대의 죄를 자기 책임으로 여겨선 안 된다”라는 대답에서도 읽히듯, 이 영화는 무자비한 전쟁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개개인의 삶과 그들의 가정을 통째로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더 나아가 하나의 국가가 다른 국가를 지배하고 식민지화하려는 획책이 상대 국가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더불어 그 고통이 치유되기까지의 너무도 큰 시간적, 정신적, 물질적 회복의 과정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픈 역사의 증언인 이 작품은 과거 타민족의 침입에 의한 수많은 전쟁을 겪은 것은 물론 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치욕적, 치명적 사건이 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로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여러 상처들을 떠안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쉽게 간과하기 어려운, 여러 복잡한 상념들을 불러일으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아름답게 꾸며진 성탄 트리 옆에서 어린이들이 부르는 캐럴을 즐기고 있는 하이드리히의 모습, 막상 캐럴이 끝나자 그 어린이들을 향해 “다 함께 Fuhrer(총통)를 섬기면서 그의 ‘영광된 이름’을 위해 유럽을 정화(purify)할 아이들”이라고 격려하는 말을 들으며, 진정한 기독교 정신을 위험한 것으로 치부하고 기독교 이념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국가사회주의(나치즘)”를 추구했으면서도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외형만을 따르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본모습을 은폐하려던 나치 독일의 실상과 함께, 나치즘을 대하던 당시 교회들의 양분된 태도가 오늘날 일본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 그리고 “광복절”을 정의하는 - 한국인들의 양분된 태도에 시사하는 바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당시 독일 치하의 유럽 교회와 기독교인들 사이에 철저한 아첨과 굴복, 자신들의 신앙적 유산을 부인하고 기독교에 나치즘적 이념을 혼합하려는 역겨운 시도가 있었던 반면, 오직 신앙으로 굳게 서서 가혹한 박해에도 용감하고 강인하게 저항하던 사람들도 있었듯, 창씨개명과 황국신민화정책(Japanization)을 주창하던 친일파와 매국노의 반대편에는 민족의 정기를 잃지 않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애국지사들의 결사항전이 있었던 것이니까요. 물론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의 속국이기를 자청하며 독립 투쟁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곧 영국으로 돌아가게 될 - 그리고 그간 연인 사이가 된 - 얀과의 이별을 앞두고 잠시 성당을 빠져나온 그와의 짧은 만남을 나눈 안나가, 오빠를 찾으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길이 엇갈린 후 찾아온 잉드리시카의 말을 듣고 방금 헤어진 얀을 소리쳐 불렀음에도 결국 붙잡지 못한 채 뒤로 남겨지는 광경 역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카렐의 간계에 속아 알려 준 아타의 정보에 따라 성당 주위로 몰려드는 엄청난 병력의 나치군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면서, 결국 최루가스에 이은 살수차의 물 주입에도 항복을 거부한 얀과 요세프로부터의 두 발의 총성에 의해 사태가 마무리되기까지 자리를 지키는 두 여성의 모습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끝까지 지켜보던 십자가 주변의 여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영화 “부산행,” “설국열차” 등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 도무지 희망이라곤 없어 보이지만 주님의 죽으심 이후 진정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듯, 그 두 여성을 통해 계속될 생명의 잉태와 탄생이라는 희망을, 그리고 대원들은 보지 못했던 ‘새벽’이 그들로 인해 새날을 맞을 수 있는 사람들에겐 주어지리라는 희망을, 상징하는 듯 여겨지는 마무리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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