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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갑판 밑 인어 Mar 12. 2024

시어머니 같은 외할머니(4)

 할머니를 <"사랑하는 엄마"의 엄마>로 재정립한 지는 수년이 되었으나, 최근의 우리 집에서의 숙박 동안에는 시어머니가 있다면 이런 느낌 일까로 변모되었다.


 아들은 너무나도 사랑하며, 남의 집 딸인 나에게는 이것저것 온갖 잡일을 시키고, 

내게 시켰지만, 내가 조금 있다가 하겠다며 미룬 일은 당신이 하실지언정 아들에게는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나에게는 자기가 먹다 남겨 아까운 밥을 주고, 고작 전기밥솥 버튼 하나 눌려 밥을 만들어 놓은 아들에게는 감동받아 침 튀기는 칭찬을 일장연설로 늘어놓고,

아들은 찔끔 남은 설거지나 해대면서 "제가 안 하면 --이가 화내요~"같은 소리나 해대고,

주위 어른들은 늙고 노쇠한 어르신이 안타깝지도 않냐, 그것도 못 맞춰주냐 같은 말로 나의 인간성을 의심하고,

외식을 하자고 하면 뭣하러 헛돈을 쓰냐, 그저 간단히 집에서 먹으면 되지라는 말로 속을 갑갑하게 하고,

명절 시즌 위주로 가끔 교류하지만, 나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어르신. 

이게 바로 흔히 인터넷에서 사례로 접했던 고약한 시월드의 어머니가 아닐까.


 나에게 미디어에 나오는 고약한 시어미니와 할머니의 다른 점은 다른 딱히 할머니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거다. 할머니가 잔소리하는 게 싫어서 방문을 닫고 들어가서 몇 시간이고 방에서 나오질 않기도 하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라는 말에 조금 있다가 할 테니깐 그냥 좀 두시라고도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쫓아오는 잔소리는 왈칵 짜증을 부르고, 할머니의 눈치는 보지 않지만 사랑하는 엄마의 엄마라는 점에서 예의를 지키려고 속으로 삭여본다. 그렇다고 싹싹하고 공손하다는 건 아니고. 불퉁한 태도는 숨겨지지 않고, 그저 적극적으로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마치 시어머니가 사랑하는 남편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가정교육 못 배워먹었다고 엄마, 아빠가 욕 먹일까 짜증이 나도 삼키는 것과 다른 바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엄마"의 엄마>라는 관계가 촉촉하진 않았지만, 버석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공유하는 사이이니깐.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유전자까지도 공유하는 사이라는 게 명칭에서도 명확하다. 


 그러나 미디어 속 고얀 시어머니 같은 할머니는 사랑하는 엄마의 엄마보다도 타인이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소도시에서 대도시로 거주지를 옮긴 엄마를 종종 결혼 이주 여성이라고 일컫는다. 엄마는 결혼 이주 여성의 숙명으로 낯선 도시에서 오롯이 혼자서 대부분의 육아를 해냈고, 결혼 이주 직장인의 2세대인 나는 지리적 여건으로 자연스레 조부모와의 교류가 그렇게 잦지 않았다. 그래서 조부모와의 이런 관계가 필연적이라 생각해 크게 유감은 없다. 그래도 가끔은 이게 최선이었나 싶긴 하다. 

 누군가는 언젠가 너 후회할 거라고 말할 거라는 것을 안다. 그 언젠가는 아마 다시 재회할 수 없는 시간을 뜻하는 거겠지. 함께한 시간이 아주 없진 않으니, 나도 분명 조금은 할머니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엄마를 잃어 슬퍼하는 엄마의 슬픔에 더 공감할 것이다. 


 이런저런 불만이 있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엄마의 엄마에게, 사랑하는 딸의 딸에게 최소한의 일정한 역할을 다했다.  언젠가는 불만들은 다 잊고, 서로의 충실했던 역할만을 그리워하고 싶다.  

그 어떤 추가적인 수식어도 없이, 사랑하는 엄마의 엄마라는 의미만 남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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