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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갑판 밑 인어 Sep 17. 2024

한 때는 그들이 안쓰러웠는데 이제는 그들이 부러워 보여

치열하게 못 살겠어요.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들을 볼 때마다 과한 공감 능력인지, 인지능력인지로 언젠가는 저게 내 미래의 모습이 되겠지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내 속에 조금씩 스미었다. 나도 저러한 말로를 맞이하겠지.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저런 미래가 닥쳐오기 전까지 매일을 충실하게,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내야 하는데. 과연 지금의 나는 충실하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매일 의문스러웠고, 두려웠고, 은근하게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 사람들과 나를 좀처럼 구별해서, 떼내서 생각하지 못했다. 저 사람의 모습이 언젠가의 나의 모습이리라.

나의 한정된 시간을, 자원을, 생명을.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행복할까? 

언젠가 저렇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라서 너무나도 두렵고, 저 사람보다 더 빨리 나는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라는 것은 너무나도 불확실해서 너무나도 불안하다. 


그래서 병상에 누운 환자들을 언제나 회피하고 싶었다. 

언젠가의 내 모습을 지속적으로 마주하는 건 유쾌하지 않았다.

점점 내려가는 카운트다운의 소리, 째깍째깍 초침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불안하다. 초조하다.

그래도 그런 환자를 많이 보면 조금은 무뎌진다. 째깍째깍의 소리가 은은해진다. 

매번 두려움과 불안감에 빠지지는 않지만, 한 번 맡았던 두려움과 불안감의 향은 완전히 종적을 감추진 못 해 주기적으로 불쑥불쑥 진해졌고, 소리는 귓가를 웽웽 맴돌았다. 



 얼마 간의 세월이 지나 와상 환자가 아닌 외래 환자들을 주로 볼 일이 잦아졌다. 

아프다고 불편감을 호소하지만, 그들의 고통이 내 것처럼 와닿지는 않았다. 

통증이라는 건 너무나도 주관적인 영역이라서 이게 나를 항상 어렵게 했다.  

많은 고령층의 환자들은 이제 그 통증을 일부처럼 여긴다. 그들도 안다. 이 통증은 자연스러운 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은 하나, 영원히 떼낼 수는 없고, 정도 조절이라도, 심해지지 않기만이라도 바라고 치료를 받는다.

치료를 받고 나서도 또 금세 아플 수 있으나 그 사이만이라도 덜 아프기를 좇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결연하지만 그래서 나름 의연하다. 그래서인지 편안하게 치료를 받는다.

안 낫는다고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통증 제거가 아니라 경감이 목표다.

편안하고 의연하게 치료를 받는 고령의 환자들을 보면.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후반전을 마무리해 내가고 있다. 

이미 치열하게 살았으리라.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으로 온몸에 퇴행성 변화를 새겼으리라.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부럽다. 

벌써 인생이라는 과업이 절반이 지나 어느 정도 마무리 된 시점.

이제 그들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인생의 과정을 얼추 다 밟았고.

이제는 치열함 보다는 그 치열함의 산물과 반동들로 살아가고 있다.



어째서인지 이 나이에 벌써 그들이 부럽다.

치열하게 살아갈 앞 날들이 두렵고.

치열하게 살아갈 에너지와 의지가 없고.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많은 세월에 압도당하고. 

스스로의 삶에 만족할지 불만족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다 끝난 그들이 부럽다.


젊음을 아까워하며 전전긍긍하던 날이 바로 몇 개월 전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이제는 안온한 죽음이 가까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와상으로 무기력함에 휩싸여 죽음을 기다리는 게 싫었던 것이지 어쩌면 안온한 죽음을 외면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무것도 이룬 것도, 방향도 잡지 못한 지금. 

앞으로의 남은 세월이 기회가 아니라 숙제처럼 느껴진다.


남들만큼 즐겁고, 충실하게 살아가고 싶었는데, 그와 동반되는 치열함에 이미 압도당했다.

힘들어. 이 숙제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부여되는 성적은 궁금하지 않아.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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