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지방 소도시에 산다. 나는 사람도 차도 별로 없는 이 도시가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딸아이는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은 ‘인 서울’을 외치더니 급기야 실행에 옮겼다. 그림에 재능이 있던 아이는 각종 미술 대회에 출전하며 높은 성적으로 입상하더니 관련 대학에 들어갔다. 우리는 서울로 와 자취방을 얻었고 아이는 혼자서도 일상생활을 척척 해나갔다. 나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날 느닷없이 휴학을 선언했다. 디자이너를 꿈꿨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오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다고 했다. 나는 아이의 결정을 존중했다. 아이는 생활비는 자신이 충당하겠다며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는 이 또한 스스로 길을 찾는 과정이고 인생 경험이라 생각하고 아이를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전화가 울렸다. 아이는 갑자기 응급실에 왔다며 너무 배가 아프다고 했다. 나는 정신이 혼비백산해 허둥지둥 서울로 올라왔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잠시 후 의사가 불러 가보니 의사는 다급한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이제 술이 좀 깨냐고 했다. 아이는 겸연쩍게 웃었고 나는 무슨 영문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의사는 엑스레이 검사 결과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마치 조카에게 타이르듯 과음하면 어떤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는지 의학적으로 자상하게 설명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의사의 충고와 설명을 듣고 위장약을 받아 병원을 나섰다.
나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아이 역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병원 앞에서 간단히 우동을 먹은 후 나는 곧장 집으로 내려왔다. 나는 아이가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아이에게서는 애교 많고 어리광 부리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고통과 방황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실망인지 안타까움인지 배신감인지 상실감인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집에 내려와 몇 달이 흘렀다. 그동안 카톡 메시지는 무미건조한 안부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엊그제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다음 주 금요일에 아빠 엄마 보러 내려온다고 했다. 아빠에게는 엄마가 화가 아직 안 풀린 모양이라고 했다. 전화를 끊자 잠시 후 카톡으로 문자가 왔다.
‘엄마 목소리 들으니 눈물 나요 …… 사랑해요, 엄마.’
눈물은 가장 진한 공감의 언어다. 아이의 문자에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비로소 내 복잡하던 마음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다음 주에 딸아이가 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엄마는 훌쩍 커버린 너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