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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함정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by 언제나 바람처럼


새해 달력을 벌써 한 장 넘긴 날, 입춘이 무색하게 하얗게 쏟아지는 눈을 보며 철 지난 영화를 다시 봤다. 한참 노동자 계급과 이민자 등 사회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다루는 다르덴 형제 감독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오늘 본 영화는 《내일을 위한 시간》이다.


여자는 우울증으로 신경 안정제에 의지하며 초췌하고 쇠약한 모습이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최근 자신의 해고를 두고 투표했다는 소식에 절망한다. 하지만 그건 사장이 직원을 감축하려고 직원들 간에 투표를 부친 결과다. 주어진 선택권은 ‘보너스 1,000유로 vs 여자의 해직’. 동료들은 1,000유로를 택했고 여자는 해고당할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의리파 동료의 권유로 사장을 찾아가 사정하고, 투표 과정에서 작업반장의 협박이 있었다고 해명하며 투표를 다시 하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사장은 마지못해 월요일까지 재투표 하되 결과에 승복하라고 다짐을 받는다.


여자는 주말 동안 열여섯 명의 동료를 차례로 찾아가 설득한다. 1,000유로는 적은 돈이 아니다. 동료들은 여자가 해직되기를 원치는 않지만, 돈을 포기할 형편도 못 된다. 동료들은 하나같이 선택 앞에서 갈등한다.


한 명 만날 때마다 여자는 신경 안정제를 먹고 마음을 다잡아 용기를 낸다. 자꾸만 약해지고 포기하려는 여자를 남편은 애정과 인내로 일으켜 준다. 동료들은 거절도 하지만 여자의 얼굴을 보고는 여자 편에 찬성하기로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는 도중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남자 동료가 여자의 몸을 밀치기도 하면서 여자는 좌절한다. 이젠 도저히 안 될 거라 마음먹고 신경 안정제 30알을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는다. 바로 그때 여자의 부탁을 거절할 뻔하던 동료가 집으로 찾아오고, 여자 편에 투표하기로 했다고 말해준다. 여자는 약을 먹었다고 털어놓고 급히 병원에 실려간다. 회복한 여자는 자신을 찾아와 준 동료에게 힘을 얻어 나머지 사람도 저녁에 찾아가 부탁하기로 한다. 몇 명은 찬성해 주지만 아직 과반수에 미치지는 않는다.


최선을 다해 동료들을 설득한 여자는 월요일 출근한다. 모여있는 동료들이 투표를 진행하고 결과는 8대 8. 한 표 차이로 과반을 못 넘기고 여자는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해 준 여덟 명의 동료와 따뜻하게 인사를 나눈다. 그때 사물함에서 짐을 정리하는 여자를 사장이 부른다.


사장은 직원을 여덟 명이나 설득했냐고 하면서 직원 분위기 등을 고려해 여자를 남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다만 당장은 아니고 계약직 직원 하나가 두 달 후 그만두면 그 자리로 복직하라고 한다. 여자는 다른 사람이 일자리를 잃게 만들며 복직하고 싶지는 않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선다.


처음부터 ‘보너스 1,000유로 vs 여자의 해직’은 불합리한 선택지다. 둘을 나란히 놓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여자가 계속 근무하게 되어 다른 동료들이 보너스를 못 받는다고 해도 그건 여자의 잘못이 아니다. 여자의 해고와 동료들의 보너스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장 사무실을 당당히 걸어 나온 여자는 비로소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어린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하면서 말한다.


"그래도 우리 잘 싸웠지?"


투표 과반을 넘기진 못했지만, 여자는 동료들에게 외면당하지 않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확인했으며, 사장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 싸웠다.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자괴감과 우울증에 빠졌던 여자는 비로소 자신감을 회복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갈등하는 모습이다. 동료들은 돈도 필요하고 같이 일하던 동료의 해고도 안타깝다. 돈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뿐더러 다들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다. 하지만 돈을 포기하고 여자의 해고를 막는 쪽을 선택한다.


동료 하나는 여자 편을 들기로 했다가 남편과 싸우기까지 한다. 여자는 자기 때문에 그럴 필요 없다고 말리지만 동료는 말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처음 내린 결정이라고, 남편과도 끝낼 거라고 환한 표정으로 말한다.


동료들은 갈등은 했지만 각자 ‘주체적 결정’을 내린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애초에 선택지가 비교 대상이 안 될 때도 있다. 영화처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길이가 다른 시소에 올라타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결국 사람들은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우리는 협력적 의사소통을 발전시켜 왔다고 한다.


‘사람 아기는 첫 단어를 말하거나 자기 이름을 배우기 전에 협력적 의사소통을 할 줄 안다. 우리가 기쁠 때 타인은 슬퍼할 수 있으며 역으로 타인이 기쁠 때 우리가 슬플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가 나쁜 행동을 하고 거짓말로 덮는 법을 배우기 전에, 혹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부터, 우리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을 습득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혼란스러운 요즘, 선동가들은 갈등을 부추긴다. 하지만 우리에겐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내재 되어 있다. 그것도 거짓말로 덮는 법을 배우기 전부터. 그러니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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