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장인 김세평 Jun 16. 2024

결초보은 완두콩밥

결초보은(結草報恩) - 죽어서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음

<야채를 못 먹어요> #01 결초보은 완두콩밥



어린 시절 나는 라면에 들어가는 야채 건더기도 못 먹을 정도로 야채를 전혀 먹질 못했다(그래도 지금은 조금은 먹을 줄 안다). 그렇다보니 나는 야채가 만연한 집 밖의 음식은 감히 도전할 생각은 못했고 늘 집에서 식사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에 학교에 급식 시설이 설치되면서 급식을 먹어야만 상황에 처한 나는 이제 집이 아닌 밖에서 밥을 먹어야한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을 했다.


그렇게 긴장한 채로 맞이한 급식시간. 나는 식판을 들고서 반찬들을 하나씩 받아서 보는데, 대부분 야채로 구성되어 있어서 사실상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앞으로 점심시간에 도대체 뭘 먹어야할지 참 문제였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글쎄 담임선생님이 잔반을 일절 남기지 못하게 했다. 선생님 한 명도 빠짐없이 잔반을 남겼는지 검사를 했고, 누가 쌀 한 톨이라도 남기면 어김없이 매를 드셨다.


야채를 먹질 못하는 나는 당연 야채를 한가득 남긴 식판을 들고 담임선생님께 검사를 받았고, 그렇게 나의 급식시간은 담임선생님께 두들겨 맞는 시간이 되었다. 시간을 재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밥 먹는 시간보다 선생님한테 맞는 시간이 더 길었을 거다.


“야, 김세평. 너 또 야채 안 먹고 지금 검사받으러 온 거야? 오늘도 혼 좀 나야겠구나!”     


“서, 선생님. 한 번만 봐주세요. 저 진짜 야채를 못 먹어서 그래요…….”     


지금 생각해보면 담임선생님 눈에 나는 지지리 말도 안 듣는 불량학생으로만 보였을 거다.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던 것이, 만약 내가 야채를 먹기라도 한다면 분명 오바이트 쇼(?)를 한껏 시전했을 거다.


그렇다보니 내 입장에서는 친구들 앞에서 토느니 차라리 그냥 선생님께 맞는 게 나을 수 있겠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며칠을 내내 선생님께 두들겨 맞다보니 너무 힘들어, 결국 나는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내 이야기를 듣고 놀라신 어머니는 바로 담임선생님을 만나러 학교를 찾아오셨다. 물론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학생이 선생님께 맞는 게 당연히 여겨졌기에 어머니는 민원제기는 생각도 못하셨고, 그저 아들이 야채를 먹지 못하는 체질이어서 그러니 잔반을 좀 남길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셨다.


솔직히 그때는 어머니가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선생님께 부탁을 하셨기에 어린 마음에 뭔가 좀 창피하고 그랬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부탁을 선생님이 좀 들어주셔서 이제는 급식시간에 야채잔반을 좀 남길 수 있게 되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에도 결국 소용은 없었다. 선생님은 끝까지 자신의 급식철학(?)을 고수하셨고 계속 잔반을 남기는 내게 매를 드시겠다고 하셨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어머니 찬스마저 실패로 끝나니까 그때 내 인생 처음으로 절망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몸소 이해하게 되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참 다행이었던 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었다는 거다. 그날도 어김없이 식판에 담은 야채반찬들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었는데, 어디서 누가 흐느끼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옆 분단에 앉아있던 민준이가 훌쩍이고 있었다.


“민준아. 뭔 일 있어? 왜 밥 먹다 말고 울먹이고 그래??”     


“아니, 밥에 완두콩이 한가득 있잖아. 나 완두콩은 진짜 싫어하는데…….”     


“어? 너 완두콩 못 먹어??”     


흑흑. 분명 선생님 내가 남긴 콩 수대로 나를 때리시겠지?”     


뭘 맞을 생각부터 하냐? 나 완두콩 좋아하니까 네 콩은 내가 다 먹어줄게. 걱정하지마!”     


“지, 진짜?!”     


야채를 먹지 못하였지만 콩 먹는 건 또 좋아다(콩은 야채가 아닌가보다). 나는 민준이 식판에 있던 완두콩들을 싹 내 입에 털어놓고는 민준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그만 울먹이라고 달래주었다. 녀석은 내게 고마웠던지 울음을 멈추고는 갑자기 내 식판에 있 야채잔반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세평아 고맙다! 너 야채 못 먹는다고 했지? 네가 남긴 야채들 내가 다 먹어줄!!”


“고, 고맙다 친구야!”


그날 이후로 민준이는 내가 남긴 야채잔반들을 매일 대신 먹어주었는데, 녀석이 얼마나 싹싹 긁어 먹어주었으면 내 식판은 마치 처음부터 음식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식판을 검사하던 담임선생님도 흠칫 놀랄 정도였으니, 후후.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를 갔는데 담임선생님은 어디로 가고 다른 선생님이 반에 앉아계셨다. 담임선생님이 바뀌신 건데, 이번에 오신 선생님이 알고 보니 원래 내 진짜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께서 학기 시작 전 몸이 좋지 않아 잠시 요양을 하시느라 다른 담임선생님이 임시로 오셨던 거였다


새로 오신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이 점심시간에 잔반을 남기든 말든 별 신경 쓰지 않으셨다. 이제는 야채잔반을 마음대로 남길 수 있게 되어 나는 더 이상 급식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재밌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세평 씨. 왜 갑자기 웃고 그래요? 뭐 재밌는 일 있어요??”


“네? 아, 아니에요.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요. 하하.”


얼마 전 회사식당에서 완두콩밥이 나와 나도 모르게 예전 생각이 나 피식 웃었다. 야채는 먹을 줄 몰랐어도 완두콩은 먹을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리고 그때 민준이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반대로 나도 민준이의 도움을 받지 못 했을 것이니 분명 급식시간마다 담임선생님의 매를 피하지 못했겠다.


하하. 그러고 보면 남을 도와줘서 손해 볼 건 없는 거 같기도 하다. 내가 남에게 준 도움이 나중에 또 나를 도와줄 도움이 되어 찾아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내 어릴 적 이렇게 소중한 경험이 있는데도 지금은 오히려 남 도와주기를 극히 꺼려하는(?) 내 모습이 뭔가 부끄럽게 느껴지는데?


그나저나 글을 써놓고선 제목을 생각하질 못했네? 어 완두콩밥 대신 먹어주고선 살아남게 된 거니 '기사회생 완두콩밥'으로 해야 하나? 아, 아니다. 제목은 그냥 ‘결초보은 완두콩밥’으로 하자! 그게 더 교훈적인 느낌도 나는 것 같고!!





이전 01화 거두절미 프롤로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