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묵PD Jun 24. 2024

공감능력시험을 허하라


방송국 놈()     


 교양PD로 살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연출하면 평생 만날 일 없을 사람들을 보게 된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 사이비 종교로 사기를 치는 사람, 집단 자살을 시도한 사람처럼 뉴스에 나오는 취재원들을 만난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처럼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이벤트가 열리면 방송팀을 이끌고 장기간 해외에서 체류해야 한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시기엔 하루걸러 하루 밤을 새는 일정으로 40여일을 보냈다. 한일월드컵의 열기가 꺼지지 않았던 2006년에는 40여명의 스태프들을 데리고 독일 현지에서 한 달 반을 지내기도 했다. 많은 인원의 살림을 맡아 늘 수억 원의 현금을 지니고 다녀야 했다. 방송팀이 30여일 묵었던 호텔에 현금으로 2억 가까운 숙박비를 냈다. 당시 환율로 한 장에 60만 원 정도 되었던 500유로 지폐를 꺼내 100장짜리 몇 묶음으로 지불했다. 월급쟁이로는 평생 해볼 일 없는 플렉스의 기억이 되었다. 그 이후로 500유로권은 멀리서도 본 일이 없다. 북한을 가기도 했다. 한창 남북교류가 활발할 때였다. 우리의 지원으로 씨감자 사업을 진행하는 현장에 가보았다. 김포공항에서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 놀랐다. 한반도 땅 백두산을 걸어 올라가 바라 본 천지의 모습도 잊지 못 할 기억이다. 평양 갔다 왔다고 하면 누구나 물어보는, 옥류관 냉면도 참 맛있었다.

 교양 프로그램이라도 시청률을 무시하지 못한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방법을 늘 고민하며 산다. 방송가에 떠도는 말처럼 30초에 한 번은 – 혹은 10초에 한 번은 – 시청자들이 웃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신기한 그림이든, 우스운 인터뷰든, 기발한 자막이든 넣으려고 노력한다. 가능하면 인지도 있는 연예인을 출연시켜서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애쓴다. 지금이야 매체가 다양하지만, 지상파가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던 때에는 방송 제작에 대한 무게감이 달랐다. ‘전파는 공공재이고,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배운 지상파PD로서 어느 것보다 프로그램의 품질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된다. 당연히도 주어진 조건에서 어떻게든 최대를 끌어내려는 직업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런 모습은 ‘방송국 놈들’이라는 말로 그 독한 이미지가 굳어졌다. 보통 사람들은 겪지 못 할 상황에 들어가고, 거기서 또 생각지 못 한 것까지 쥐어 짜내는 직업이 방송국 놈들이다. 나도 그 중 하나, 방송국 놈이다.        


   

딴따라 vs 언론인     


 재미와 의미를 모두 전달해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여러 자질이 요구된다. 예능은 스스로 ‘딴따라’임을 자처하며 웃음을 향해 달려간다. 각기 다른 코드를 가진 시청자들 대부분을 웃기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역으로 제작진들이 무한히 괴로워지는 과정을 거친다. 교양은 예능과 다르다. 교양프로그램은 아무 생각 없이 즐거우면 안 된다. 시청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되 다 보고 나서 감동이 남거나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관심 없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보를 기억하게 하는 일 또한 쉬울 리 없다. 눈을 떼지 못 하는 화면,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 신기한 정보들을 적절한 이야기로 엮어내야 한다. 그렇다고 욕심을 너무 내면 안 된다. 자극적인 영상을 과하게 쓰거나 눈에 띈다고 검증하지 않은 정보를 방송하면 큰 일 난다. 당장은 관심을 끌지 몰라도 나중엔 프로그램의 신뢰성을 잃는다.

 특히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더 엄격하다. 언론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잘 지켜야 한다. 험한 상황을 헤쳐 나갈 담대함과 냉철한 판단력이 요구된다. 평소에 만나지 못 할 사람을 만나고 경험해보지 못 한 상황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현장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자칫 잘 못 하면 본인은 물론 같이 하는 스태프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정확한 상황인식과 빠른 판단력을 튼튼한 무기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사PD가 취재의 난관을 견디는 이유는 명확하다. 부조리한 것을 확실하게 파헤쳐 알려야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지키는 것이 언론인의 사명이다. 당연히 정확한 사실을 찾아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다면 대담하게 넘어가야 한다. 그렇다고 이 사명감에 매몰되면 안 된다. 어디에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취재원의 기본적인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면 안 된다. 균형 잡힌 시선으로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혀 전달해야 한다. 이렇게 교양PD는 재미를 전달할 딴따라의 자질과 진실을 보여주는 언론인의 자세 모두를 가져야 한다. 교양PD들이 늘 머리 아픈 이유가 조금은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매일 머리를 쥐어뜯는 시간을 견디고 연차가 쌓여간다. PD로서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렇게 PD가 되어간다     


 내가 입사할 때 PD, 기자, 기술, 행정, 아나운서 등 방송국의 모든 직군을 다 뽑았다. PD도 드라마, 예능, 교양, 라디오 파트를 모두 뽑았다. 방송국 입사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내가 시험을 볼 때만 해도 서류-필기-실기-1차 면접-합숙-최종면접 등 석 달이 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수만 명의 지원자 중에 손에 꼽히는 숫자만 뽑혔다. 입사 직후 동기들 모두 합숙하며 연수를 받았다. 엄청난 수의 지원자들을 분야별로 다른 평가과정을 통해 뽑은 인원이었다. 서로 다를 만도 했지만, 만나 보니 대부분 큰 차이 없이 비슷해 보였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장과정을 충실히 거치고 막 사회로 진출한 초롱초롱한 눈빛의 젊은이들이었다. 다른 학교의 친구들을 만난 듯 했다. 다들 앞으로 맡을 직무는 무엇일지,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꿈에 부푼 궁금증을 마음에 안고 있었다.

 입사 후 10년을 기념해 동기들이 모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참 많이 변해 있었다. 회사에서 오가다 잠깐 대화할 때는 몰랐었다. 자리에 앉아 진득이 얘기해보니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이 직군별로 아주 달랐다. 누가 봐도 기자, 누가 얘기해도 PD였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10여 년간 내가 카메라와 함께 뛰어다닐 때 다른 친구들은 무엇을 했을까. 나는 하루에 수십 번씩 현장 상황을 판단하는데 온 신경을 써왔다. 촬영본을 정리하며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다른 일을 한 동기들은 또 다른 어려움을 해결하며 10년을 살았을 터였다. 꿈을 펼치고 싶은 반짝이는 눈의 젊은이들은 이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프로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매일 겪었을 어려움, 부딪히며 가치관을 공유했을 사람들,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게 만들었던 성취들이 말과 행동에 보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내가 그러했을 것이다. 난 그렇게 교양PD가 되어 있었다.          



종군PD     


 독일월드컵을 다녀온 직후였다. 시사프로그램 제작 업무를 맡게 되었다. 월드컵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한여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를 공습했다.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하는 헤즈볼라의 근거지가 거기 있다는 이유였다. 밤늦은 시각, 팀장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당장 레바논에 들어가야 하니 준비를 하라는 지시였다. 현지 상황은 대략의 정보밖에 파악이 안 되지만, 촬영팀을 데리고 다닐 코디네이터는 구해놨다고 했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위험을 피해 나왔고, 레바논 현지인이 섭외되어 있었다. 시차에 맞춰 현지와 통화를 해보니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음날 급히 출근해 준비물을 챙겼다. 아니, 사실 챙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전쟁터에 가본 경험이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여행자 보험이라도 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전쟁터는 여행지가 아니어서 보험이 안 된단다. 회사에 보호 장비 같은 것도 있을 리가 없었다. 분쟁지역을 전문적으로 취재해 온 외주사 PD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첫 마디가 ‘가지 말라’였다. 위험한데 왜 거길 가느냐고. 

 그렇게 준비가 덜 된 상태로 6mm 카메라 한 대 달랑 들고 조연출과 레바논으로 향했다. 수도 베이루트 공항은 이미 공습으로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육로 외에는 길이 없었다. 인접국인 시리아 공항으로 들어가 산을 넘어갔다. 가는 길에 폭격된 차들이 널려있었다. 해가 지고서야 레바논 숙소에 도착했다. 그날 밤 뉴스에 내가 들어온 그 길마저 폭격으로 닫혔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다음날부터 공습현장을 취재하러 다녔다. 우리들 외에 다른 모든 외신 기자들은 헬멧과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다. 헐렁한 면바지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내 모습과 너무 비교가 되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그곳의 현실을 담아내는 것이 나의 사명이었다. 아울러 같이 움직이는 조연출과 코디네이터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보이지 않는 그늘로 숨어야 했다. 폭격이 가장 심한 곳을 갈 때는 차 위에 청테이프로 ‘TV’라고 써 붙여서 취재 차량임을 알렸다. 완파된 건물들, 병원에서 신음하는 아이들, 삶의 터전을 잃은 가장들을 만났다. 무서운 마음을 감추고 헤즈볼라 부총재를 만나 그들의 입장을 들었다. 피난 행렬에 길이 막혀 천신만고 끝에 위험지역을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곳을 나온 지 채 한 시간이 안 되어 그 지역에 폭격이 떨어졌다. 삶과 죽음이 얽힌 현장에서 모든 신경을 끌어 모아 판단을 해야 했다. 어지럽게 얽힌 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었다. 무서울 겨를도 없이 취재를 하고 방송을 마쳤다.        


  

공감능력시험이 있다면     


 그때의 내가 잘 했던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PD로서 배워 온 덕목을 최대한 발휘해 극한의 상황을 잘 헤쳐 나온 것은 자신할 수 있다. 방송도 의미 있게 잘 담아냈다. 하지만 십 수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든다. 폭탄이 터져 움푹 파인 구덩이들, 길가에 뒹굴던 차들, 한 블록 전체가 무너진 거리들은 비교적 또렷이 기억난다. 폐쇄된 국경을 지나기 위해 피난행렬 틈바구니에서 마음 졸이며 여권을 들이 밀던 현장도 손에 잡힐 듯 생각난다. 프로그램에 담기 위해 취재해야 할 내용들을 촘촘히 생각하며 다녔던 상황도 다 떠오른다. 하지만, 참 이상하다. 내가 만났던 현장의 사람들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테러리스트가 아닌데도 폭격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헤즈볼라와 관계없지만 단지 그 지역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었다. 가족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평생 살던 곳을 떠날 여력이 없어 위험을 알면서도 눌러앉아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와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난 그들을 한 인간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방송을 위해 만나야 하는 한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너무도 당연히 인간보다 프로그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들의 절박한 이야기를 마음으로 담은 것이 아니라 내가 풀어내야 할 이야기의 한 요소로 쉽게 대한 것은 아닐까. 내가 만났던 사람이 내 친구였거나 가족이었다면 지금처럼 잊어버릴 수는 없지 않았을까. 그 전쟁의 본질이 인간을 존중하지 않아 벌어진 일 아니었던가.

 내게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PD가 된 것은 아니다. 시험을 치는 능력이 남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었을 뿐이다. 입사하고 좋은 PD가 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내 생각으로 만든 프로그램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명감을 다 해 일했다. 하지만 젊었을 때의 아둔함을 조금이나마 벗어난 지금 생각하면, 난 중요한 능력 하나가 모자랐던 것 같다. 사람을 대할 때 그를 한 인간으로 더 깊이 공감했어야 했다. 교양프로그램을 만드는 PD이기 이전에 사람 사이에 사는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을 놓친 것 같아 후회가 된다. 내가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일들은 대부분 시험을 잘 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 커왔고, 그 덕분에 좋은 직업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 그렇게 배운 원칙들을 의심하지 않고 일했었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과정에서 인간을 존중하는 가치가 최우선이었다면 내가 잘 할 수 있었을지 의심이 된다. 만약 공감능력시험이라는 게 있었다면 난 낙제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만나서 따뜻한 사람을 원한다. 주위에 그런 친구들이 많아야 삶이 행복하다는 것은 모두 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자질을 개인의 성격 정도로 너무 저평가 하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학능력시험이 아니라 공감능력시험이 아닐까. 그런 능력에 박수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면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조금은 과격하지만, 주장해본다. 우리 모두를 위해 공감능력시험을 허하라.

이전 10화 전문가는 전문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