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묵PD Jul 08. 2024

사람 꽃은 한 번만 피나


정원 알아 가기     


 마당을 익히는데 1년이 꼬박 걸렸다. 정원은 사시사철 변한다. 처음 본 모습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단독주택을 구해 이사를 들어간 것이 4월 중순이었다. 이삿짐이 들어오던 날 한창 꽃이 흐드러진 라일락 향기가 진하게 퍼졌다. 정원 곳곳에 있던 영산홍도 붉게 꽃피고 있었다. 그것 말고는 부동산 소개로 겨울에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큰 나무는 대부분 향나무, 소나무, 주목처럼 사시사철 변함이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집을 정할 때 나무를 유심히 보지 않은 탓도 있었다. 물론, 멋진 마당은 집을 정하는데 큰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난 그때 나무나 꽃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 했다. 겨울에 노랗게 말라 있는 잔디와 파랗게 잘 자라 있는 침엽수들이 멋지게 대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봄이 시작되고 날이 따뜻해지자 여기저기서 알 수 없는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싹이 나는 모양만 봐서는 잡초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지나 꽃이 피고서야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함박꽃, 독일붓꽃, 에키네시아, 참나리 등 이름도 처음 알게 된 꽃들이 여기저기 피었다. 나무도 마찬가지였다. 꽃이 피고서야 정확히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었다. 서부해당화, 명자나무, 아로니아, 산수국, 모란이 피고, 장미도 노랑, 하양, 분홍 등 색이 다른 꽃이 여기저기 피었다. 그렇게 1년을 다 보내고서야 내 마당에 어떤 식물들이 사는지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시간폭탄     


 가장 신기했던 것은 잡초인 줄 알고 뽑아버리려 했던 샤프란이었다. 잔디밭 한 구석에 특이한 풀이 났다. 잡초라고 하기엔 너무 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잎도 뾰족하고 길게 나는데다 두께가 꽤나 있었다. 무엇보다, 색이 아주 짙은 초록이었다. 막 싹이 나는 풀들은 대개 연한 녹색을 띠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풀은 짙은 초록 잎에 노란 줄기가 선명했다. 심상치 않아서 파보았더니 조그만 마늘 모양의 구근이 달려 있었다. 신기했다. 조심스레 캐내어 볕이 잘 드는 화단으로 옮겼다. 하지만 풀은 옮겨놓기 무섭게 시들어버렸다. 무리하게 옮긴 나를 탓하고, 기억에서 잊혀졌다. 다음해, 봄이 되자 그 자리에서 싹이 나왔다. 그리고 어느 풀보다 먼저 진한 보라색에 샛노란 술이 달린 꽃을 피웠다. 너무 신기해서 탄성을 질렀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구근이었다. 모자란 내 실수로 죽어버린 줄만 알았다. 이놈이 생명을 이어서 사계절을 지나 꽃을 피우다니. 아, 이놈들은 시간폭탄이었구나. 정확히 자신들의 생명력을 보여줘야 할 때 터지는, 아름다운 폭탄이었구나. 

 식물들은 한 자리에서 조용히 자라는 연약한 것들이라 생각했었다. 겪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식물들은 긴 시간 동안 인내하며 자신의 힘을 응축시킬 줄 안다. 어떤 것은 씨에, 어떤 것은 구근에, 또 어떤 것은 뿌리나 줄기에 자신의 가능성을 모아 둔다. 한 해가 꼬박 걸리는 일이다. 봄이 오면 이렇게 응축한 생명력을 터뜨린다. 정원 곳곳에서 이 시한폭탄이 터진다. 조용한 식물들은 뜨겁게 힘을 모으고, 시간이 되면 그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미미하다. 자연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보다 더 엄격하게 흐르고 있었다. 오히려 식물은 스스로 때에 맞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온 힘을 다 해 생명력을 모은다. 그리고 자신의 에너지를 세상에 보여줘야 할 때 꽃을 피운다. 그 큰 생명력이 인간에게까지 전달된다.   

  


사계절 꽃 피는 정원 만들기     


 내가 꿈꾸던 집은 파란 잔디밭에 사철 꽃이 피는 곳이었다. 이미 정원이 갖춰져 있는 집에 들어가 크게 손을 댈 것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곧 너무 무지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연의 때에 맞게 천천히, 그리고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다. 짧게는 1년, 길게는 십 수 년 앞을 생각하며 일해야 했다. 첫해, 내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빈카라는 풀이었다. 바닥에 덩굴 모양으로 번지고 조그만 혓바닥 같은, 반들반들한 잎을 가지고 있다. 귀여운 보라색 꽃도 핀다. 처음엔 뭐 저런 풀이 다 있네 하고 신기해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여름이 되어 잔디가 꽃밭 안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얘기가 달라졌다. 잔디는 다른 곳으로 벗어나는 순간, 잡초보다 더 무서운 놈이 된다. 경계를 만들어야 했다. 인공물로 펜스를 칠까 고민하던 때였다. 빈카가 있는 자리에 잔디가 잘 넘어오지 못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이거구나.’ 여름에 빈카가 많이 자란 곳을 파내어 포기를 나눴다. 잔디밭의 경계가 희미한 곳부터 심기 시작했다. 몇 년이 걸렸다. 그렇게 빈카가 풍성해지면 포기를 나눠서 옮겨심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거의 완벽하게 잔디와 꽃밭을 가르며 사시사철 꽃을 피운다. 무서운 자연의 번식력을 또 다른 자연의 힘으로 막아낸 결과물이다. 지금 봐도 가장 뿌듯하고, 신기하다.

 사철 꽃을 보기 위해 새로 심은 식물들도 많다. 봄에 꽃비가 날리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그렇게 맨 처음 심은 것이 벚나무다. 무럭무럭 자라서 지금은 축제에 안 가고서 꽃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꽃 한 송이 달랑 피어 있던 수국 묘목도 심었다. 지금은 한창 때 스무 송이 꽃을 자랑할 만큼 커졌다. 이렇게 조금씩 정원을 가꾸며 몇 년을 지냈다. 이젠 3월 말 샤프란이 제일 먼저 꽃피고 이어서 벚꽃, 라일락, 영산홍이 4월 초에 개화를 한다. 이어지는 4월 중순부터 5월에 거의 모든 꽃이 핀다. 세 가지 색 장미가 담벼락을 장식해준다.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 영산홍 사이로 다양한 나무와 풀들이 꽃을 피운다. 내가 좋아하는 작약도 다양한 색으로 심었다. 5월 중순엔 어른 주먹만 한 꽃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6월에는 수국과 산수국이 피어 여름이 오는 소식을 알린다. 한여름에 꽃을 즐기려고 배롱나무를 심었다. 진한 분홍빛 꽃이 7월부터 시작해 8월까지 길게 피어있다. 가을을 즐기기 위해 상사화 구근을 꽃밭에 심었다. 초여름에 잎이 사라졌다가 9월이 되면 꽃대가 올라오는 신기한 녀석들이다. 자연의 시간을 조금은 이해하고 긴 시간 준비한 결과이다. 꽃의 생명력을 느끼며 행복해진다.    

 

     

시간을 몸으로 느끼는 집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 계절의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봄이 오면 볕이 따뜻하게 살갗에 닿는다. 노랗게 말라 있던 흙과 나무에 파릇하게 싹이 돋아난다. 보이지 않았던 새들이 나타나 노래한다. 꽃이 피면 향긋한 냄새를 퍼뜨리고, 한 해 가장 화려한 시기가 펼쳐진다. 여름엔 강렬한 햇살 아래 모든 생명이 쑥쑥 자란다. 다 가을에 결실을 맺고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추운 겨울엔 모든 것이 정적 속에 묻힌다. 눈이라도 내리면 향나무와 소나무의 푸른색도 감춰져 한지에 먹으로 그린 것 같은 무채색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다 죽어 있던 것 같은 세상이 봄이 되면 다시 살아난다. 따뜻한 볕, 파릇한 싹, 지저귀는 새, 향긋한 꽃냄새가 살아난다. 이렇게 계절이 가고 생명이 피어나고 쉬는 것을 오감으로 느낀다. 

 참 복 받은 느낌이 든다. 자연을 보지 않고 살았을 때는 시간이 추상적으로만 느껴졌다. 하루가 가고 한 해를 보내는 것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오늘 하루 무사히 버텼네’, ‘벌써 또 나이 한 살 먹나’같은 관념 속의 이미지 뿐 이었다. 가는 시간을 몸으로 느끼게 된 후, 예전처럼 허무하게 시간이 가지 않는다. 봄이 되었으니 꽃이 필 것이다. 여름엔 새파란 잔디가 쑥쑥 자랄 것이다. 가을이 되면 바람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겨울엔 따뜻한 집에서 눈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구체적으로 할 일과 즐길 일들이 떠오른다. 가을에 할 수 있는 일을 봄에 할 수도 없다. 여름이 싫다고 겨울을 먼저 당겨올 수도 없다. 여름 꽃을 보고 싶으면 한해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게 심어 놓은 시간폭탄이 충분히 숙성되어 알맞게 터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 준비한 것이 언젠가 결실을 맺으리란 생각만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더 가치 있어 진다. 계절이 가는 것을 체감한 이후 받은 큰 선물이다.          



꽃다운 시절     


 인생의 황금기를 괜히 꽃다운 시절이라고 부르는 게 아닌 것 같다. 한창 꽃이 피는 5월은 누가 봐도 좋은 계절이다. 화영연화(花樣年華)나 청춘(靑春)같은 말이 다 이런 파릇한 봄을 가리키고 있다. 어디서 읽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식물들이 부럽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꽃은 지금 져도 내년에 다시 핀다. 사람은 꽃다운 청춘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저 나무가 부럽다는 글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이 들어 친구들을 만나면 다 옛날 얘기뿐이다. 젊었을 때 했던 바보 같은 짓들을 끄집어내서 히히덕 대는 게 즐거움이다. 다시 돌아오지 못 할 시절에 대한 동경이 가슴 깊이 깔려 있는 듯싶다. 하지만 정원의 꽃들을 오래 보아 온 지금, 정말 그런 것일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식물이 해마다 꽃을 피우는 것은 영근 결실을 맺기 위해서다. 조금씩 성장하며 그 꽃도 늘어난다. 꽃은 자신의 에너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가장 적극적인 소통방법이다. 자신의 생명력을 제대로 남길 때까지 스스로를 표현하길 반복한다. 젊은 시절에 화영연화가 지나간다면,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미드나잇 인 파리>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주인공은 소설가를 꿈꾸는 젊은이다. 헐리우드 각본가 처지를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모여 토론하고 즐기던 1920년대의 파리를 동경한다. 우연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자동차를 탄 주인공은 거기서 황금시대의 주인공들을 만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등을 만나 흥분한다. 그리고 거기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여인은 19세기 말의 벨 에포크를 황금시대로 동경하고 있었다. 둘은 다시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툴루즈 로트렉, 에드가 드가, 폴 고갱 같은 예술가를 만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르네상스시기를 황금시대라고 얘기하고 있다.  

 늘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아련함을 가슴 한 구석에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지나친 순간일 수도 있고, 내가 겪지 못 했던 더 옛날 이미지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왠지 지금보다 더 낭만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 이루지 못 한 것을 그때로 가면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런 마음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면 다시 더 과거를 회상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회상하지 않을까? 미래의 나에겐 지금 이 순간이 화양연화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계절이 변하는 정원을 보고 있으면, 중요하지 않은 단 한 순간이 없다. 봄에 싹을 내지 못 하면 꽃을 피우지 못 한다. 꽃이 없으면 씨앗도 내지 못 한다. 겨우내 씨로 견디지 못 하면 아름다운 폭탄도 터뜨릴 수 없다. 작은 풀꽃부터 아름드리 벚나무까지 계절에 맞게 준비하고 보여준다. 나무마다 풀마다 각자의 시간이 있다. 초봄에 꽃을 피우는 샤프란도 있고 가을에 화려한 상사화도 있다. 사람의 시간은 나무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간다. 언제 싹을 내고 언제 꽃을 피우는지 알기 어렵다. 우리가 그토록 동경하는 청춘의 시절에 모두 꽃이 피었을까? 싹만 내밀었거나, 씨로 아직 흙 속에 있진 않았을까?

 질문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사람 꽃은 한 번만 피나? 우리의 에너지를 보여줘야 할 때마다 꽃을 피우지 않았을까? 태어나서 우리는 부모님께 꽃이었다. 사랑에 빠졌을 땐 연인에게 꽃이었다. 아이들에겐 더 없이 크고 따뜻한 꽃이 된다. 정원의 꽃들처럼 우리 인생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을까 싶다. 1년을 준비해서 한 번 꽃을 피우는 것이 나무다. 우리 인생은 얼마를 기다려 꽃을 피우는지 나는 모른다. 하여, 난 때를 기다리며 충실히 살 것이다. 내 마음을 잘 준비하고 소소하게 의미를 놓치지 않는 하루들을 살고 싶다. 그렇게 살면 어느 순간 꽃처럼 보일 때가 지나가지 않을까.

이전 12화 격식과 품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