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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PD Jul 22. 2024

시간졸부


신세계와의 조우     


 국민학교를 다닐 때였다. 베이비붐 세대 끝자락에 태어난 내 또래들은 바글대는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학생이 너무 많아 입학하자마자 2부제 수업을 했다. 같이 학교를 다녔던 누나는 공간이 부족해 과학실을 교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도 숫자가 늘어 넘쳤던가 보다. 3학년이 되니 분교가 생겼다. 나름 좀 더 먼 곳으로 통학을 하게 됐다. 용도 모를 넓은 땅을 높게 둘러싼 담벼락과 야산 사이로 난 흙길을 한참 걸어가야 했다. 그 길이 끝나면 미용실, 정육점처럼 본교 앞에서는 볼 수 없던 가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 이름도 생소했던 전자오락실이 하나 있었다. 집에 PC는커녕 전자계산기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난 전자오락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친구들이 너무 재미있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것 하나 없었지만 너무 신기했다. 내 머릿속에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우주선이 날아다니며 레이저를 쏜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적들이 사라진다. 한 단계씩 임무를 완수하는 내 모습이 대견하다. 적들의 공격을 아깝게 피하지 못 한 분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50원짜리 동전 하나로 내 모든 감각을 자극하는 경험이었다. 그때까지 노는 것은 흙바닥에 줄을 그어 놓고 친구들과 뛰어다니는 일 뿐이었다. 뒷산에 올라가 쥐불놀이를 하거나 메뚜기를 잡으러 다니는 일 정도였다. 헌데, 컬러TV같은 모니터 속에서 내 맘대로 날아다니는 우주선을 타게 되었다. 완벽한 신세계였다. 열 살짜리 꼬맹이가 만난 이 세계는 이후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오락실 죽돌이와 황영조     


 10대 시절, 깨 있던 시간 대부분은 오락실에서 보냈다. 천 원 지폐 한 장이 굉장히 크던 때였다. 잘 해야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밖에 없었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없으니 신중하게 고른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동전을 넣는다. 온 정신력을 끌어 모아 게임을 한다. 늘 아쉽게 끝이 난다. 돈이 다 떨어져도 그곳을 떠나지 못 한다.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하는지 관찰한다. 동네 고수라도 나타나면 나 뿐 아니라 코찔찔이 아이들이 모두 그를 에워싼다. “우와~ 저렇게 하는 거구나” 탄성이 이어진다. 집에 들어갈 시간이 다 되어도 떠나질 못 한다. 빨리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리지만, 뿅뿅 쾅쾅 하는 소리에서 빠져나오지 못 한다. 

 새로운 게임을 찾아 원정을 가기도 했다. 시내 번화가에 있는 큰 게임센터에는 온갖 신기한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불량한 학생들이 자주 출몰했다. 당연히도 삥 뜯길 일이 생겼다. 생전 처음 보는 형들이 돈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무서운 마음에 오돌오돌 떨다가 이게 아니다 싶었다.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다. 따라 나온 녀석들이 날 붙잡으려 할 때 소리를 꺅 질렀다. “여기 깡패다! 깡패가 내 돈 가져가요!” 어디서 그런 깡이 나왔나 모르겠다. 그 노는 형들도 그래봐야 중학생이었을 터였다. 다가오지 못 했다. “야 너 조심해 너 어디 다니는지 다 알아” 그 이후 그들을 만난 적은 없다. 그래도 무서웠다. 하지만, 그런 험한 일을 당해도 오락실을 끊지 못 했다. 

 고등학교에선 밤12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학교가 너무 지긋지긋했다. 공부를 하기 싫어 땡땡이를 치고 오락실을 갔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못 먹은 도시락은 친구들 주고 책상에 엎드려 잤다. 오직 게임을 할 때만 눈이 초롱초롱 했다. 주말에도 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학교를 가지 않고 오락실에 죽치고 있다 집에 갔다. 다음날 등교해서 선생님한테 멍이 들도록 매를 맞는다. 그럼 그 주말은 학교를 간다. 이렇게 격주로 매를 맞으며 게임을 했다. 이런 내게 황영조 선수는 아주 특별하다. 여름방학 중이었다. 학교를 가기 싫어 오락실로 땡땡이를 치다가 선생님에게 붙잡혔다. 황영조 선수가 56년 만에 마라톤 금메달을 딴 날이었다.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다. 선생님은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며 30분 넘게 일장 연설을 하셨다. ‘니가 오락실에서 시간을 낭비할 때 우리 황영조 선수는 이를 악물고 운동을 했다’고 했다. ‘너처럼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차라리 매를 맞는 게 낫겠다 싶을 때 연설을 끝내셨다. 그 말을 듣고 내가 개과천선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황영조는 억울하겠지만 그는 이제 내 오락실 인생의 적이 되었고, 난 그 세계에서 꾸준히 놀았다. 날 잘 아는 친구들은 그 당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있었으면 난 그걸 했을 거라고 입 모아 말한다.       


   

말썽 총량의 법칙     


 대학에 들어가서도 게임은 계속 했다. 게임뿐인가, 훨씬 많은 시간을 더 다양하게 노는데 썼다. 힘든 공부는 고등학교까지만 하고 대학은 노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던 때다. 호시절이었다. 수업을 빼먹고 놀러 다녀도 다 그러려니 했다. 당시는 아직 만 19세가 지나지 않은 학생이 음주를 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단속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선배들 전언으로는 관할 경찰서장이 대학생이 되면 놀아야 하니 그런 단속은 안 한다고 선언을 했다나. 암묵적인 합의가 만천하에 드러날 정도로 맘대로 노는 여건이었다. 남는 게 시간이었다. 학점은 대충 따고 노는데 시간을 펑펑 썼다. 돈은 없었지만 시간은 많았다. 시간을 어떻게 쓰는 게 잘 쓰는 건지는 몰랐다. 그렇게 가진 게 시간밖에 없는 시간 졸부로 맘껏 누리고 다녔다.

 “인간의 일생에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 술에 취해 친구가 한 말이다. 거의 하루도 안 빼놓고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야 집에 가던 때다. 그날도 어김없이 취해서 각자 해본 해괴한 일들을 떠들고 있었다. 그렇게 ‘나 이런 것까지 해봤다’ 배틀이 벌어졌다. 온갖 괴상한 경험들이 쏟아져 나왔다. 글로 옮기면 등급 검열에 걸릴 일, 너무 지저분해서 숟가락을 놓아야 할 일, 누가 봐도 미친 사람이나 할 짓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저마다 희한하게 인생을 낭비한다고 웃고 떠들던 와중에 저 말이 나왔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사고치는 양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어릴 때 말썽쟁이였던 애들은 커서는 점잖아지고, 젊었을 때 얌전한 애들은 나중에 큰 사고를 치게 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인군자가 아니어서 자신의 욕망을 삐뚤게 분출하고 싶은 날이 온단다. 그걸 해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다. 이러니 말썽을 피우려면 젊을 때 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었다. 그땐 우스갯소리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저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나중에 ‘말썽 총량의 법칙’이라는 다소 완곡한 단어로 같은 말을 꽤 여러 번 들었다.



새는 투쟁하며 알에서 나온다     


 복학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인사불성이 되는 술자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락실 출입을 멈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왔다. 대학에 가기 위한 것이나 누가 짜준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공부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분야를 파고드는 기쁨을 자각했다. 전공을 미학으로 정했던 가장 큰 이유를 잊고 있었다. 그림을 보고 그 속의 이야기를 파악하고 싶어 정한 공부였다. 더 나아가, 이런 것으로 방송으로 만드는 직업도 꿈꾸고 있었다. 제대 후 미술사와 영상을 중심으로 공부를 했다. 너무나 재미있었다. 예전엔 그렇게 어렵던 공부가 왜 이리 쉬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허랑방탕하게 논 것 같았지만, 그렇게 보낸 시간이 곧 나를 찾는 과정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정답인 세상에서만 살아왔다. 그게 너무 싫어서 일탈을 하고 매를 맞았지만, 싫던 것이 좋아지지 않았다. 무엇이 좋은지 스스로 확신이 없던 젊은이였다. 좋은 것, 싫은 것, 깨끗한 것, 더러운 것, 쉬운 것, 어려운 것 등등 이제껏 보지 못 한 것들을 그 시간 속에서 조금씩 겪었던 것 같다. 정확히 인식하고 살지는 않았다. 같은 또래들이 욕망하는 것들에 몸을 맡기고 떠다니다 자연스레 나를 찾은 것이다.

 젊은 시절 읽었던 <데미안>은 내게 큰 울림을 준 작품이었다. 싱클레어는 아버지의 집으로 상징되는 밝은 세상 안에서만 살았었다. 이런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 자신의 세계를 찾아가는 여정은 내 마음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줬다. 데미안이 건넨 쪽지의 글은 지금 읽어도 그 힘이 느껴진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헤세가 적은 이 심오한 문장처럼 살진 않았다. 그런 철학적 의식을 가지고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시간 졸부로 살지 않았다면 알에서 나오지 못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스스로 삶의 방향과 가치관, 좋고 싫음을 책임지는 마음으로 판단할 수 없게 되었을 것 같다. 난, 그렇게 마음껏 쓰는 시간 속에서 독립된 성인의 모습을 그려내는 방법을 배웠다고 확신한다.          



사람이라는 자원     


 대한민국은 사람이라는 자원으로 성장한 나라다. 일제가 수탈하고 전쟁으로 망가져 있었다. 쳐다볼 것은 사람밖에 없던 가난한 나라였다. 어떻게든 사람을 가르치고 일을 시켜서 절대빈곤을 벗어나야 했다. 퇴근이고 주말이고 없이 열심히 일했다. 제국주의 열강처럼 남들을 수탈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에너지를 짜내서 성장했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자랑스레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을 쏟아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당시 우리를 버티게 한 것이 있었다. 열심히 하면 뭔가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다.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일했다. 이 힘은 스스로 겪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남아도는 시간에 늘 배고픔을 겪었을 것이다. 빈곤을 탈출하면 그 시간이 안온한 여유로 채워지리라 생각했다. 스스로 겪은 시간 속에서 내재된 가치가 쉬지 않고 뛸 에너지를 줬다. 양적인 성장이 곧 행복이던 시절이었다.

 난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저들은 무엇을 보고 달리고 있을까. 또, 어떤 가치에서 힘을 끌어올릴까. 유치원도 명문이 있는 시대에 자란 사람들이다. 하교를 하고 마음껏 자유 시간을 즐기지 못 한 세대들이다. 학교도 학과도 모두 치밀하게 등급이 매겨져 있다. 어릴 때부터 경쟁을 체화하고 살아왔다. 사회에서 정해 놓은 성공을 향해 달린다. 집에 돌아와서는 힘들게 일하고 온 부모를 봐야 했다. 아빠도 엄마도 학원비며 아파트값을 벌기 위해 여유 없이 사는 것을 보고 자랐다. 월급쟁이로 여유롭게 사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도 많이 줄었다.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은 이제 굳건한 가치가 아니다. 조금만 잘 못 하면 인생에서 실패한다는 공포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재된 공포로 쉴 새 없이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허랑방탕하게 시간을 보내면 손가락질을 받는 세상이다. 가장 많은 시간을 가졌을 때 마음껏 써보지 못 하고 성인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들은, 스스로 알을 깨트리고 새로운 세상을 나온 것일까, 부모세대가 견고히 다져놓은 세계 안에서 절망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발전을 위해 사람이란 자원을 너무 낭비한 것은 아닐까. 사람은 자신에게 가치 있는 목표를 품어야 충분한 에너지를 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일지 찾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지금은 사회에서 던진 경쟁에 모든 시간을 쏟아 붓고 나만의 행복을 고민하고 구현할 여유가 없다. 부자나라라는 목표를 위해 달렸다. 그 중요한 성취는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여유로운 삶’에 본질적인 행복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피땀 흘려 이루었다는 지금 모습이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행복한 사회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시칠리아 동네 빵집     


 난 가진 일이 뭐든 행복하게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를 꿈꾼다. TV를 보면 시칠리아 동네 빵집 같은, 유럽 시골구석 구멍가게 사장들의 웃음을 만난다. 난 그 웃음이 부럽다. 거기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삶의 여유가 담겨 있다. 그들이 대단한 기술을 가졌다거나 엄청난 사회적 성공을 한 것은 아니다. 시칠리아 동네 빵집 사장님이 대학을 나왔을 리 없다. 아마도 아버지가 빵을 만드는 것을 보며 자랐을 것이다. 학교에선 글 읽는 것 정도만 배웠을 것이다. 남는 시간엔 들로 뛰어다니고 친구들과 투닥 대며 자랐을 것이다. 집에서 만든 빵과 질박한 포도주 한 잔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엄마 나 빵집 할래. 학교 안 가”라고 선언했을 때 축복해줄 부모가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어릴 적 여유롭던 시절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지금은 왜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다음 세대들에겐 그런 여유를 쉽게 내어주지 못 하는 걸까. 동네에서 소박하게 빵집을 하는 것이 불안한 삶을 의미하는, 그런 세상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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