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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PD Jul 29. 2024

살아남은 자의 허무함


1796, Karte von Grossbritannien und Ireland     


 <1796년 발행, 영국과 아일랜드 지도>. 집 거실에 있는 고지도다. 동판인쇄물에 채색이 되어 있다. Kitchen Dorret와 Jefferys가 만들었고, Franz Johann Joseph von Reilly가 비엔나에서 출판했다고 적혀있다. 크기는 가로 80에 세로 70센티미터 정도이다. 런던에서 구매했다. 연수로 영국에 거주하고 있을 때였다. 집 근처 노팅힐에서 주말 벼룩시장이 열렸다. 포르토벨로 거리를 따라 온갖 신기한 물건들이 가판에 펼쳐져 있었다. 구경도 하고 예쁜 것들은 사진으로 담으며 시간을 보내던 길이었다. 언덕을 천천히 내려가던 그 때 눈을 잡아끄는 가게가 보였다. 간판부터 문까지 전면이 짙은 버건디색으로 칠해져 있는 집이었다. 고급스런 금색 글씨로 ‘The Portobello Print & Map Shop’이라고 적혀 있었다. 창문에는 예쁜 고지도와 소품 인쇄물들이 붙어 있었다. 신기했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커다란 하얀 개가 나를 보며 꼬리를 흔들어줬다.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별천지였다. 박물관이나 큰 도서관에나 가야 볼 수 있을 것 같은 오래된 인쇄물들이 다양하게 있었다. 예쁜 새가 인쇄된 손바닥 크기의 카드부터 연대가 무척 오래 되어 보이는 큰 세계지도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인심 좋아 보이는 주인장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 하니 한반도 고지도도 일부러 찾아 보여줬다. 동해가 ‘East Sea’라고 표기되어 있으니 귀한 것이라고 은근히 세일즈를 했다. 웃음으로 물리치고 둘러보던 중, 저 지도를 발견했다. 색감과 구성이 눈을 끌었다. 내가 지금 생활하는 영국의 오래 된 모습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난 이런 출판물에는 문외한이다. 뭐가 좋은지, 혹은 값이 나가는지 전혀 모른다. 평소에 이런 것들을 사서 집을 장식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난, 나를 위해 저 지도를 샀다. 런던에서 겪었던, 다시는 만나지 못 할 많은 경험들을 저 영국 지도에 담아 가져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잘 견뎌 온 나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           



The Great White Way, 그리고 코로나19     


 6개월간 해외 연수를 갔었다. 문화사업 일을 하던 때였다. 뮤지컬 현장과 그 밖의 예술문화 중심지의 트렌드를 살펴보는 계획을 세웠다. 뮤지컬은 뉴욕 브로드웨이와 런던 웨스트엔드가 중심지이다. 뉴욕에서 작품을 보고 영국으로 넘어가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잡았다. 그 사이에 이탈리아 일정도 넣어 놓았다. 프랑스 위주의 전시 콘텐츠에 대안은 없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뉴욕에 들어갔다. 한 달 남짓의 일정으로 생활을 시작했다. 짧은 일정으로 여행을 왔을 때나 촬영차 들렀을 때와 느낌이 많이 달랐다. 낮에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활기찬 도시를 느꼈다. 밤에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브로드웨이와 그 안에서 펼쳐지는 꿈과 환상의 무대, 뮤지컬을 탐닉했다. 브로드웨이는 미국인들이 ‘위대한 하얀 길(The Great White Way)’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한다. 불이 꺼지지 않는 밝은 길. 천조국 미국의 영광을 표현하기엔 이처럼 적절한 곳이 없다. 그렇게 맨해튼에서 지내길 한 달, 이탈리아로의 출국이 다가오던 때였다. WHO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했다. 곧바로 브로드웨이의 모든 극장이 셧다운 되었다. 식당도 문을 닫았다. 생필품 가게 외의 모든 곳이 닫혔다. 뉴욕이 멈췄다. 위대한 하얀 길의 불이 꺼졌다.

 연수를 준비할 때 이미 위험은 시작되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신종 유행병이 번진다는 뉴스가 연일 도배되었다. 코로나 발생 초기, 한국은 그 중에서도 심각한 나라 중 하나였다. 출국할 때 불안하긴 했지만, 한국보다는 나은 곳으로 간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갔었다. 팬데믹 선언 후 상황은 역전됐다. 미국에서 감염자가 폭증했다. 환자와 시체를 수용할 곳이 없어서 센트럴파크에 야전병원이 설치되었다. 거리엔 인적이 사라졌다. 가끔 다니는 사람들 눈빛엔 공포가 가득했다.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늘어나는 사망자에 온 나라가 패닉에 빠진 모습이었다. 연수로 잡았던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다. 이태리 내 숙소들도 모두 문을 닫았고, 방문 예정이었던 기관들도 모두 멈췄다. 회사에 연락했다. 너무 위험하니 잠시 연수를 멈췄다가 나아지면 나올 수 있냐고 문의했다. 역시 회사는 냉정했다. 불가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국에 들어오면 그 순간 연수는 끝나는 거라고 했다. 맨해튼 한 가운데서 누구의 도움 없이 큰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다.   


       

먹고 버티고 살고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도 구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황을 봐서 다음을 결정하기로 했다. 뉴욕에 도착해 자리를 잡았던 곳은 맨해튼의 헬스키친(Hell’s Kitchen)이라는 지역이었다. 타임스퀘어를 중심으로 극장이 몰려 있는 극장지구(Theater District)에 인접한 곳이다. 공연이 모두 정지된 상태여서 그 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센트럴파크와 가까운 어퍼이스트(Upper East) 지역으로 옮겼다. 센트럴파크가 맨해튼에서 유일하게 자연과 함께 편히 숨을 쉴 수 있는 곳이라는 판단이었다. 어퍼이스트는 명품샵이 가득한 부촌이다. <섹스 앤 더 시티> 주인공들이 화려한 생활을 하는 무대가 바로 그곳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관광객이 모두 빠져나가서 저렴한 가격에 방을 얻을 수 있었다. 평생 다시 살아 볼 일 없는 동네 한복판이었다. 짐을 들고 옮겨가던 거리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집근처에 있던 에르메스, 샤넬 같은 럭셔리 브랜드샵들엔 마네킹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길거리에 정말 개미새끼가 없을 만큼, 아무 것도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았다. 재난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광경이었다.

 죽지 않고 먹고 사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TV를 켠다. 뉴스를 보며 상황을 파악한다. 책이나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보낸다. 답답할 때 센트럴파크에 걸어가서 산책을 한다. 할 것이 없다 보니 공원엔 잠시 나온 뉴요커들이 많았다. 모두 모르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같이 온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다녔다. 대중교통수단도 타는 것이 꺼려졌다. 장도 걸어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삼시세끼 집에서 차려 먹었다. 코로나는 점점 그 맹위를 높였다. 감염이 되면 외국인 신분으로 갈 병원도 마땅치 않았다. 누구 하나 코로나에 걸리면 당사자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물론, 가족 모두 곤란해지는 상황이었다. 산다는 말이 평소와 다른 맥락으로 읽혔다. 일상을 영위하는 의미보다 살아남는다는 뜻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져갔다. 더 버틸 수 없었다. 가족을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삼시세끼 런던편     


 영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일 감염자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었다. 2020년 초, 버티지 못 한 영국 정부는 이동제한령을 내렸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몇 가지 경우로 규제했다.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한 쇼핑 외에는 달리기, 걷기, 자전거 타기 중 하나를 골라 하루 한번만 외출이 가능했다. 경찰은 이동제한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물렸다. 함께 거주하는 사람 외에 3인 이상 공공장소에 모이면 안 됐다. 장례식을 제외한 행사 모두가 허용되지 않았다. 혼자 런던으로 넘어가 노팅힐과 인접한 사우스켄싱턴에 집을 잡았다. 베컴이 산다는 동네다. 어퍼이스트에 이어 평생 다시는 가보지 못 할 부촌이었다. 팬데믹에 억울한데 에라 모르겠단 심정으로 정했다. 가까이 넓은 공원이 두 군데가 있는 것이 중요했다. 잘 갖춰진 거실 겸 부엌과 넓은 침실이 있는 플랫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집세를 내야 하지만, 당시엔 가격이 1/4도 안 되었다. 집이 아무리 좋은 데 있어도 할 것은 없었다. 상황이 저러하니 혼자 밥을 해먹고 산책하는 일상이 연속되었다.

 끼니는 정말 열심히 챙겨먹었다. 가까운데 큰 마트가 세 군데나 있었다. 한식 재료는 다행히도 슈퍼맨 런던이라는 한인마트에서 배달을 해줬다. 먹는 것이라도 잘 해야 서럽지 않았다. 내가 잘 해먹어야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편안해졌다. 걱정을 하다가도 해먹은 음식 사진을 보여주면 조금이나마 안심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레시피를 다 한번 씩 해보았던 것 같다. 백숙, 잔치국수, 닭도리탕, 제육, 생선조림, 짜장밥, 채소 고기볶음 등등 한식은 재료가 허락하는 만큼 해먹었다. 특히 꼬리찜과 꼬리곰탕은 완전히 마스터했다. 좋은 고기를 싸게 살 수 있었고, 한번 끓여 놓으면 오래 꺼내 먹을 수 있었다. 아침으론 샌드위치, 컨티넨탈 조식, 누룽지 등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챙겼다. 고기를 이용한 스테이크나 각종 파스타도 자주 해먹었다. 세끼를 해먹으니 밥이 많이 필요했다. 밥솥이 없어서 매번 밥을 하는 게 번거로웠다. 냄비로 밥을 잔뜩 해서 랩으로 1인분씩 소분해 냉동실에 넣고 꺼내먹었다. 김치가 귀해서 반찬도 만들어야 했다. 오이무침, 감자채음을 자주 했다. 상추가 없으니 로메인을 사다가 겉절이를 했다. 나중엔 치킨무도 만들어 먹었다. 큰 위안은 내가 좋아하는 영국맥주를 다양하게 마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펍을 가지는 못 했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다양한 병맥주를 원 없이 마셨다. 런던 특산 드라이진도 늘 종류를 달리 해서 구비했다. 울적할 때 진토닉을 마시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터득한 진토닉 레시피는 지금도 내 비밀병기 중 하나다.          



평온함을 찬양하라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는 7월이 되자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비록 방문객 수를 제한하긴 했지만 박물관이나 전시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내셔널 갤러리를 시작으로 국공립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이 재개관했다. 식당들도 다시 문을 열었다. 내 몸이 온전히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상황인지라 식당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은 최대한 피했다. 그래도 집에서 먹는 삼시세끼가 더 다채로워졌다. 걸어서 십분 거리엔 170년 된 정육점 겸 샤퀴테리가 있었다. 가끔 쉐퍼드파이나 소시지를 사다가 오븐에 구워먹으면 별미였다. 토요일에는 집 뒤편 공터에 ‘Notting Hill Farmers' Market’이라는 농산물 장터가 열렸다. 싸고 질 좋은 야채나 고기들을 맘껏 사서 먹을 수 있었다. 블랙푸딩과 베이크트 빈이 잔뜩 올라간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사다 먹기도 했다. 집 바로 앞 펍에서는 말 그대로 일요일에만 파는 선데이로스트를 주문해 가져왔다. 영국 맥주 한 잔과 먹는 로스트비프와 요크셔푸딩의 맛은 기가 막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식당으로 가야 할 때도 있었다. 홍차 마니아가 애프터눈티를 빠트릴 수 없었다. 괜찮다는 곳을 한참 찾아 이름난 호텔로 갔다. 호텔 전용 다기와 블렌딩 홍차가 나왔다. 정식 영국 스타일의 오이샌드위치, 버터의 부드러움에 녹던 스콘, 다채로운 디저트가 너무도 환상적이었다. 가끔 눈을 들어 로비의 피아노 연주자와 눈인사를 하는 여유도 좋았다. 아직 코로나의 공포가 다 해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평온한 일상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아 행복해졌다.

 이렇게 모든 일정이 끝날 무렵 노팅힐의 지도가게를 발견했다. 하늘도 파랗고 볕도 딱 적당한 날이었다. 포르토벨로 길가의 가판들이 새롭게 보였다. 오랜 기간 이어 온 장터였을 것이다. 그 다채로운 볼거리에 세계적인 관광지가 됐을 터였다. 이 모든 것이 긴 기간 멈추는 것을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공포 속을 헤매고 빛이 조금씩 내려오는 느낌이었다. 나도, 그들도 살아남은 것이다. 평온한 일상이 이처럼 소중한 것인지 피부 아래 뼛속까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가게에서 저 영국지도를 보며 오랜 기간 버텨 온 내 시간들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 지도는 사야 했다. 그 암울함을 기억하기 위해서, 지금 느끼는 평온함을 찬양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겪은 나를 위해서.           



살아남은 자의 허무함     


 8월 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로도 코로나는 그 기세를 꺾지 않았다. 이후 3년여가 지난 2023년 5월에야 WHO가 팬데믹 종료를 선언했다. 그사이 전 세계 사람들은 감염의 공포 속에 살았다. 가족을 잃고 직업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종료 선언 후 얼마 안 된 요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한 느낌이다. 어두운 그 시절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일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고 있다. 나는 가끔 저 지도를 보면 대견함과 동시에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난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걸까.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삼시세끼 챙겨먹었다.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진심으로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맞이한 평온함은 그 짧은 순간의 감격뿐이었던 것인가. 지금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내는 생활이 좀 허무하게 느껴진다.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고, 괴롭던 일들은 잊히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 수고로움을 잊지 않으려 한다. 평온한 일상은 너무도 귀하다. 그때의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허무함을 물리칠 수 있도록, 대견한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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