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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PD Aug 12. 2024

“에이, 그게 아니지”


종교가 없는 자의 반가사유상     


 밥벌이는 누구에게나 힘들다.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버는 호사는 세상에 몇이나 누릴 수 있을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일에 녹록한 것은 없다. 나는 월급쟁이다. 내 자산은 몸뚱이 하나뿐이다. 지금껏 유일한 밥벌이 방법은 내 노동력을 파는 것이었다. 노동으로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시간의 양과 효율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데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능력 키워 노동시간의 가치를 높이려고 노력한다. 헌데, 나는 노동가치가 능력만으로 평가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월급쟁이로 오래 살다보니 받는 돈의 크기는 ‘싫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 양’에 비례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남들이 하기 싫은 업무일수록 높게 평가된다는 뜻이다. 그 스트레스를 견딜 의지가 있는 사람이 승진도 하고 월급도 더 받는다.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사람문제다. 밉상 상사나 말귀 어두운 후임의 얼굴을 떠올려 보라. 답답한 마음이 들 것이다. 일이 많거나 어려워 힘든 경우도 떠올려 보자. 혼자서라도 일을 할 수 있으면 그마나 괜찮다. 이 경우에도 정말 힘든 때는 업무를 지시한 사람이나 일과 엮인 관계가 납득이 안 되는 경우다. 사람 사이에서 살아 인간(人間)이지 않나. 좋든 싫든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논리적 비약이 있긴 하지만, 사람 스트레스를 참는 양만큼 월급을 받는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내 사무실 책상 한편에는 자그마한 반가사유상이 하나 놓여있다. 밥벌이의 짜증이 밀려들 때 잠시 쳐다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불교신자는 아니다. 평생 특정한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다. 성격 탓인지 절대자에게 의지를 기탁하는 경험을 해보지 못 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편하다고 조언을 많이 해준다. 이해는 된다. 그래도 본래 회의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 마음 깊이 누군가 와주시지는 않는다. 안 좋은 문제가 생기면 알아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애초에 해결이 안 되는 문제도 있다. 사람 사이의 문제는 내 의지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그런 짜증들이 쌓이고 쌓여 힘이 들 때 난 잠시 반가사유상을 쳐다본다. 종교적 심성은 없지만 저 초월자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한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내려놓아진다.          



사람을 대하는 고단함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사람 유형이 있다. 내 경우에는 무슨 얘길 꺼내도 “그게 아니지”하고 답하는 부류다. 대화는 서로 마음속에 있는 것을 꺼내서 공유하는 과정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하고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꺼내도 돌아오는 대답이 “그게 아니지”인 사람이 있다. ‘일단 네가 하는 말은 틀렸으니 내가 하는 말을 들어봐라’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한참 본인 의견을 말한다. 그걸 듣고 내 생각을 실어 답을 해봐도 대개 “에이 그게 아니지”를 몇 번 더 반복한다. 대화는 하는데 생각이 공유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 꽤 많다.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나아가 관계에서의 주도권도 독점하고 싶어 한다. 네가 틀리고 내가 맞아야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심리가 아닐까. 내 선입견을 좀 더 얹어보면, 이런 부류는 자존감이 약한 사람이거나 늘 갑의 위치로 살아온 행운아인 경우이다. 내 말이 틀릴 때 감당할 자존감이 없으면 남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남이 나를 부정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 한 사람에게 본인이 틀리는 경우의 수는 없다. 둘 중 어느 유형이건 내가 피곤하긴 마찬가지다. 내 주위에 ‘그게 아니지MAN’이 많으면 인생이 급격하게 피곤해진다. 내 생각, 내 감정은 안중에 없는 사람들이다. 누구보다 나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소통으로서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업무에 크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이러면 월급은 안 늘고 괴로움만 늘어난다. 하나 첨언하자면, “그게 아니지”와 쌍둥이는 “내가 아는데”이다.

 ‘그게 아니지MAN’과 대부분의 일이 얽혀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도 틀린 말이 되었다. 새로운 발전방향이나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상상해보시라. 열심히 준비해서 아이디어를 설명한다. 바로 답이 돌아온다. “에이 그게 아니지” 맥이 탁 풀린다. 원래 새로운 아이디어 중에 누구에게나 이거다 싶은 것은 거의 없다. 아무 것도 없는 맨땅에서 일구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별 것 아닌 것을 뒤집어 보고 톺아보고 해야 의미가 찾아지는 법이다. 좋은 것이든 썩은 것이든 그 땅 위에 뭐라도 올리지 않으면 시작이 안 된다. 쌓다가 틀리면 방향이나 틀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얹지 않으면 끝까지 빈 땅만 남는다. 그게 아니지 신공으로 쳐내기만 하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게 아니지MAN’ 앞에서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남의 성격을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최대한 맞춰 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것도 하루 이틀이다. 영원히 아무 일 없이 유지될 수는 없었다. 난 낯빛이 거무튀튀해지고 사람 만나기를 꺼리는 인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사유의 방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그 때 ‘사유의 방’을 알게 되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반가사유상을 동시에 만나는 귀한 공간이다. 사유의 방이 생기기 전에는 직접 보기도 힘든 걸작들이었다. 운 좋게 전시품으로 나와 있어도 유리창 너머로 죄수 면회하듯 했어야 했다. 박물관은 ‘작품의 무덤’이라고 평가절하 된다. 작품이 원래 놓여 있던 환경이나 맥락과 무관하게 박물관의 논리에 맞는 공간에 전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유의 방은 달랐다. 온전히 반가사유상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전시실의 색, 질감, 조명, 관람동선, 관람객의 시선위치까지 배려되어 있어 위대한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한 표정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머리끝에서 시작해 얼굴에 닿을 듯 한 손을 지나 발까지 이어지는 유려한 선을 또렷이 관찰할 수 있었다. 작품의 아름다움에 놀란다. 이런 작품을 만든 예술가의 깊은 심성을 찬양한다. 그리고 이 초월자의 고요한 얼굴에 마음을 위로 받는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은 ‘한 다리를 무릎에 얹은 자세로 생각을 하고 있는 조각상’이라는 뜻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이름이다. 예전엔 이 작품을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라고 불렀었다. 불교에는 여래(如來)와 보살(菩薩)이 있다. 여래는 완전히 깨달은 존재를 말한다. 세상의 온갖 번뇌를 벗어난 존재이다. 보살은 여래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자이다. 그러나 스스로 세운 고귀한 목표인 ‘서원(誓願)’을 이룬 후 여래가 될 것을 천명한 존재들이다. 관음보살은 이 세상에 고통 받는 중생이 없어져야 여래가 되겠다는 서원을 가진 분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분이다. 미륵은 아직 인간계에 나타나지 않은 보살이다. 미래에 나타나 중생들을 구제한 후 여래가 될 존재이다. 미륵보살은 도솔천이라는 하늘에서 어떻게 중생들을 구제할지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 이런 교리 때문에 한국사에서 민초들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많은 지도자나 사이비들이 자신을 미륵이라고 칭했다. 내가 너희들이 바라 마지 않았던 미래불의 환생이라는 것이 레퍼토리이다.

 미륵은 저 하늘 위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안위에 대한 것은 그 속에 없다. 오직 번뇌에 빠진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줄 방법을 깊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의 형상이라고 특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주장이다. 그렇다 보니 ‘미륵보살’이란 말을 빼고 반가사유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저 초월자는 인간의 번뇌를 뛰어넘는 진리에 대해 생각하며 온화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려하고 있다. 자신은 이미 초월하여 거슬리는 것 없는 상태다. 무엇을 대면해도 마음이 평안한 존재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겪어 본 자만이 얘기할 수 있는 깊은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을 무지한 사람들에게 쉽게 전해주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절대적인 평안함으로 인도하고 싶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반가사유상에 형상화되어 있다.          



헛된 집착, 그리고 인연     


 불교철학을 들여다보면 근대 서양 인식론과 닮은 면이 있다. 칸트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꿔 서양철학의 판을 뒤집어 놓았다. 그의 인식론을 극단적으로 도식화하자면, 본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대로 보여진다는 주장이다. 그의 철학 이전엔 바깥에 대상이 있고, 우리의 인식은 그것을 따라간다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그게 맞는 것 아니야?’하고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우리는 머릿속에 가진 개념에 맞춰 대상을 판단하고 세상을 본다. ‘개념 없는 사람’과 대화를 하기 힘든 건 그의 세계가 다른 사람과 너무 다르기 때문 아니겠는가. 불교도 매우 비슷하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바깥의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받아들이고 본인의 개념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오온(五蘊)을 거친다. 이 과정이 모여 나의 세상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 양 착각한다.

 문제는 이 인식 과정이 늘 옳게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상해보자. 어두운 숲을 걸어가던 사람이 있다. 그런데 저 앞에 뱀을 발견한다. 너무 놀라서 뒤로 도망쳤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썩어가는 동아줄이었다. 도망친 사람에게 그것은 동아줄이 아니라 뱀이다. 본질과 무관하게 허상으로 인식을 채운다. 그는 착각이란 걸 모르고 무서운 기억을 하나 가진다. 아마도 그 경험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나마 영향을 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 ‘뱀 만난 썰’을 풀며 영향을 주기도 한다.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은 인간 인식의 허망함 파고든다. 뱀과 동아줄의 일화처럼 인간의 인식은 일시적인 감각과 감정의 집합일 뿐이다. 인간의 감각은 허상을 믿고 집착을 낳는다. ‘그게 아니지MAN’처럼 본인 생각이 맞아야 한다. 본디 허무한 인식뿐인데 어리석은 중생이 그것에 집착한다. 그리고 이 집착이 남을 괴롭히는 고통이 된다.

 인식은 주변의 영향도 받는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냄새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는 법이다. 나라는 사람은 주위의 인연에 밀접하게 영향을 받는다. 제석천은 온 세상을 그물망으로 덮어놓고 그 아래 촘촘히 유리알을 달아놓았다고 전한다. 인간은 그 유리알과 같아서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연결되어 있다. 하나에서 그 다음으로 또 그 옆으로 무한히 연결된다. 나의 집착은 내게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남에게 영향을 주고 다시 나 또한 영향을 받는다. 내가 온전히 빛나려면 나를 닦음과 동시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아야 한다. 내가 가진 세계가 집착에 찬 것을 깨닫고, 좋은 인연을 맺는다. 상상만 해도 평안한 삶이 그러지지 않는가?    



그럴 수도 있겠다     


 반가사유상의 얼굴은 집착의 고통을 끊어낸 평화로운 모습이다. 이 위대한 깨달음을 가르쳐주기 위해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생각에 잠겨 있다. 해탈에 다다르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구상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바른 견해를 가지고 치우침 없이 세상을 보고(正見), 바른 마음가짐으로 이치에 맞게 생각(正思惟)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통해 바르게 말하고(正語) 몸으로 실천(正業)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이 모든 것을 생활 습관으로 받아들여(正命) 끊임없이 노력(正精進)해야 한다. 늘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어야(正念)하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의 평정을 찾도록 집중(正定)해야 한다. 이 여덟 가지 가르침(八正道)을 다 하려니 벌써부터 힘들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일단 가장 쉬운 것부터 실천해보려 한다. ‘그게 아니지MAN’이 되지 않기 위해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일단 긍정부터 하려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일단 한 박자 내 생각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이해해보려 한다. 그리고 내가 틀린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려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짧은 말 한 마디를 건네며 반가사유상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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