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마를 꽤 오랫동안 했다. 멋진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기분은 어떨까? 백마 탄 왕자님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 정도 현실 감각은 있다. 그래도 만주 평야를 질주하며 장총을 휘두르는 정우성을 본 사람이면 ‘와 멋있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왜 다들 그렇게 말을 멋있게 타는지, 은연중에 넋을 빼고 보게 된다. 그렇게 되지 못 한다는 것, 잘 안다. 그래도 그 비슷하게라도 가보길 꿈꾸는 건 자유다. 승마는 귀족 스포츠 이미지다. ‘있어 보이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시작할 생각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재벌가의 자제들이 승마 선수였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다. 나라를 통째로 들었다 놓았던 국정농단 사태 때에도 승마가 핵심 키워드였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있던 사람들만 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벽이 느껴졌었다. 월급을 받아 빚 갚고 밥 먹는 보통사람들은 할 수 없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나 같은 대다수의 인식을 깨기 위해 마사회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시 인근에 생각보다 많은 승마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헬스장 가는 수준의 합리적인 비용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마장 몇 군데를 둘러보고 체험 승마를 해보았다.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그렇게 그림의 떡 같았던 승마를 시작했다.
볼 포비아
운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타고난 운동신경이 둔하다. 어릴 적 호리호리한 체형 때문에 재빠를 것이라는 오해를 받곤 했지만, 뭐든 해보면 금방 탄로 난다. 공에 대해서는 약간의 공포증도 있다. 공에 맞은 트라우마 같은 것은 없다. 그래도 공이 내게 날아오면 일단 피한다. 공을 잘 다룰 수 있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둔한 신경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저걸 받을 수나 있을지, 받더라도 또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마음이 복잡해진다. 머리에서 시킨 대로 몸이 잘 안 되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 체육시간이나 친구들과 놀 때 열심히 뛰긴 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죽자고 해도 잘 되지 않으니 즐겁지 않았다. 공을 더 멀리 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저걸 가까이 하다간 다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마음속에 자란 듯싶다. 이렇게 공만 보면 놀 거리가 생각나는 대부분의 남자아이들과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자랐다.
승부욕도 별로 없는 편이다. 내가 직접 경기를 하든 응원을 하든 마찬가지다. 스포츠를 하게 되면 승부가 갈리는 결과가 나온다. 경기에 지고도 마냥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난 이겼을 때도 그리 좋지만은 않다. 온 몸의 힘을 쥐어짜 경기에 임한다. 엎치락뒤치락 하며 조마조마한 경쟁을 펼친다.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몸을 컨트롤하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견딘다. 그리고 쟁취하는 승리의 짜릿함! 그 감동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난 이상하게 그 짜릿함은 잠깐 지나가고 허무함이 더 길게 느껴진다. 이긴 자의 쾌감에 죄책감이 든다. 이기든 지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승자가 그 경기의 가치를 독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똑같이 노력했는데 둘 중 하나만 빛나는 것이 싫었다. 아름다운 승복, 진정성 있는 스포츠맨십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스포츠가 가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져도 상관없다면 처음부터 게임이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져야 한다. 거기서 새로운 가치를 찾는 것은 패자의 몫이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렇다 보니 난 져도, 이겨도 유쾌한 기분이 들지 않아 허무함이 찾아온다. 승부욕이 생길 리 없다.
나를 이겨라
남과 경쟁하지 않는 운동을 찾게 된다. 나 스스로와 경쟁을 하는 것을 찾는다고 할까. 노력해서 조금씩 한계를 넘는 운동을 선택하게 된다. 나를 단련하여 체력을 기르고 스스로 발전하는 운동이 좋다. 그렇다고 웨이트 중심의 근력운동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몸을 멋지게 만들어 보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조각 같은 몸에 대한 환상이 없으니 지루할 뿐이다. 피트니스는 내 몸의 각종 수치들이 정상 근처에 머무르게 해 줄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한다. 이렇게 다 제하고 남은 것이 스키와 승마다. 스스로 빨리 달리지 못 해서 그런 것일까, 성격이 급해서 그런 것일까, 스피드를 내는 운동이 재미있다. 내 힘을 쓰지 않고 중력이나 동물의 힘을 빌려 달리는 것이니 게을러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 에너지를 컨트롤하는 짜릿함이 온 몸으로 전해진다. 평소엔 느껴보지 못 한 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달리면 스트레스가 후두둑 떨어져 날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승마를 해본 사람은 안다. 운동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말이 앞으로 진행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터벅터벅 걷는 ‘평보’. 그리고 그것보다 좀 빨리 겅중겅중 두박자로 뛰듯 걷는 ‘속보’가 있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보는, 다가닥다가닥 세박자로 뛰는 것을 ‘구보’라고 한다. 승마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다들 멋지게 구보를 하며 달리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게 쉽지 않다. 평보는 말이나 기수 모두 쉬는 자세다. 체험승마를 하면 누군가 고삐를 끌어주고 평보로 가는 것을 잠깐 경험하게 된다. 크게 어렵지 않은 단계이다. 그러나 속보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다각다각 뛰는 말의 움직임에 내 몸을 맞춰주지 못 하면 말도 힘들고 내 꼬리뼈도 피곤해진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해야 한다. 뛰듯이 걷는 말 위에서 스쾃을 하는 셈이다. 달리다 보면 내 몸에서 나는 열과 말의 체온이 더해져 땀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허리는 끊어질 것 같다. 그래도 멈추면 안 된다. 그렇게 앉아버리는 순간 말도 멈춘다. 모든 스포츠에 기본기가 있듯, 승마의 기본기는 속보이다. 속보를 마스터하지 못 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더 중요한 점은, 속보의 자세가 바르게 잡혀야 승마를 하는 사람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꼿꼿하고 품위 있는 승마를 생각한다면, 이 기본기를 완전히 마스터해야 한다. 지겨워도 내가 노력하고 극복하지 않는 한 품위 있는 승마의 경지엔 다다를 수 없다.
눈치게임
승마를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내가 타고 있는 것이 지능과 감정을 가진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말은 올라타기만 한다고 달리지 않는다. 차를 몰 때는 차의 감정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엑셀을 밟고 방향에 맞춰 운전대를 감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된다. 그런데, 그 차가 갑자기 자신의 의지가 생겨 내 말을 안 듣는다면 어떤 느낌일지. 차가 눈이 많이 온 날 나가기 싫다고 맘대로 안 움직인다던가, 어제 가벼운 접촉사고가 나서 오늘은 유달리 거칠게 반응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말은 눈치도 빠르고 매일 변덕도 심하다. 올라 탄 사람이 초보라고 느끼면 말도 잘 듣지 않는다. 가라 해도 가지 않고, 속도를 내다가도 맘대로 서버린다. 교감이 잘 되지 않고 화나게 하면 큰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낙마를 한 적도 있다. 여러 말이 줄지어 가며 연습을 하다가 앞서 가던 말이 놀라자 내 말도 놀라 펄쩍 뛰어 떨어진 것이다. 안장의 높이는 대략 성인의 키 정도 된다. 목말을 타고 달리다가 어깨 위에서 떨어지면 어떻겠는가. 승마를 잘 하기 위해서는 말과 꾸준히 교감해야 한다. 달리기 싫어하는 말을, 혹은 너무 빨리 달리는 말을 내가 원하는 속도로 제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눈치게임을 해야 한다. 그렇게 말 위에서 앉았다 일어서길 반복하며 내 근육을 키우고 말을 컨트롤 하는 법을 배워야 비로소 구보를 할 수 있게 된다.
처음 구보를 할 때 너무 무서웠다. 보기만 할 때는 시원하고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직접 그 속도와 진동을 몸으로 받으니 생각 이상의 공포가 생겼다. 목말을 탔는데 전력질주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불안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내가 이 말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다. 잠깐이라도 집중력을 놓친다면 사고가 날 수 있다. 스키를 배울 때도 두려움을 느꼈다. 맨 처음 리프트를 타고 오른 초급자 코스는 가파른 절벽 같았다. 속도를 제어하지 못 해 넘어지고 구른다. 운동신경이 둔한 나는 슬로프 옆으로 처박히고 스키가 떨어져 달아나는 경험을 수없이 했다. 그렇게 업앤다운 리듬을 익히고 다리와 허리의 힘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성장한다. 실력이 늘어도 위험은 항상 있다. 슬로프 상태나 다른 스키어들이 가지는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승마는 단순한 위치에너지가 아닌 동물의 힘을 빌려 움직인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제어해야할 변수가 스키보다 훨씬 많아진다.
미혹되지 않는 삶이라니
인생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말을 제어하는 것보다 훨씬 다루기 힘든 것이 인생이다. 커가며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그럭저럭 맞추며 살았다. 별로 엇나가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그렇다고 인생이 내 마음처럼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 현명하고 단단한 어른이 될 줄 알았다. 웬만한 문제엔 감정의 동요가 일지 않고, 나아갈 방향을 척척 짚어낼 줄 알았다. 살아보니 그렇지 않았다. 아직도 내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딘가 꼬여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툭툭 튀어나오는 걸 느낀다. 나이 사십이 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나이, 불혹(不惑)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나이가 한참을 지났는데 오히려 더 많이 흔들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생은 말처럼 달려가는데, 나는 가끔 어딘가에 미혹되어 그 말을 제어하지 못 하고 있는 것 같다. 아차 잘 못 하면 그 말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우리는 쉽게 사십엔 불혹, 오십엔 지천명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원전을 찾아보면 이 명칭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이 말이 나오는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編)을 보자.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자왈,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삼십에 일어섰으며, 사십에 미혹되지 않았고, 오십에 천명을 알게 되었으며, 육십에 귀가 순해져, 칠십에는 마음이 가는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보이는가? ‘나는’ 그랬다는 것이다. 공자쯤 되는 사람이 나이 들고 뒤돌아보니 저렇게 살았다는 뜻이다. 공자처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신을 연마한 사람이 사십이 되어서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얻은 것이다. 사십년간 매일매일 기본기를 연마한 사람이 다다른 경지란 말이다. 공자의 발끝에도 미치기 어려운 필부인 나는 어떻겠는가. 멋지게 말을 타고 초원을 가르는 모습이 좋다고 기본도 없이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을 다루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인생살이에서 나는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속도를 알고 있는 것일까. 꼿꼿이 멋있는 자세로 말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빠른 말 위에 위태롭게 얹혀 있는 것은 아닐까.
騎虎之勢를 지양하며
조금 어설퍼도 말을 타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봐도 멋있게 질주하는 만큼은 아니다. 그래도 말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즐길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욕심을 내서 당장 영화의 주인공처럼 달려 볼 생각은 없다. 내 둔한 운동신경이 허락하는 정도로 조금씩 배워도 충분히 즐겁다. 처음 승마를 배웠던 마음이 나를 이기고 단련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인생도 비슷하다. 남들이 달린다고 무작정 달리고 싶지 않다. 무리하게 달려 제어할 수 없는 호랑이 등에 탄 모양새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지금 속도로 가면 칠십이 되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상을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어떠한가. 바른 자세로 인생을 이해하고 내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품위 있지 않을까. 살다가 말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제어할 수 없는 속도에서 떨어져 다시 말에 오르지 못 하면 안 될 일이다. 꼿꼿이 기본기를 지키고 가다 보면 적당한 속도를 찾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살다가 육십에 미혹되지 않는 마음을 얻고 칠십에 천명을 알게 되어도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