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를 좋아한다. 차, 특히 홍차를 좋아하면 필연적으로 찻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차의 종류와 맛, 향기를 알게 되면 제대로 마시고 싶어진다. 차를 내리는 방법, 예쁘게 서빙을 하는 감각, 함께 먹으면 좋을 음식 같은 확장된 문화가 따라온다. 당연히 좋은 찻잔 세트를 구비하는 것이 애호가들의 공통적인 취미가 된다. 나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찻잔의 매력에 빠져 다양한 도자기들을 보았고, 책도 많이 읽었다. 영국 도자기 브랜드 역사에 대한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책에서 위대한 장인들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지금 우리가 아름다운 자기 제품을 쉽게 쓰는데 영국 장인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 수많은 실험으로 얇고 튼튼한 본차이나 기술을 완성했다. 전사 기법을 연구해 고급스런 문양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했다. 지금 우리가 부엌과 화장실에서 만나는, 미감과 위생의 질을 한껏 올린 타일들도 영국 장인들이 기술을 발전시켜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만들어 낸 장인들의 피와 땀이 책에 자세히 담겨 있었다.
로열 덜튼(Royal Doulton)에 대한 내용을 읽던 중이었다. 다양한 실용품과 예술작품 이야기가 끝나고 식탁을 장식하는 인형들(figurine)이 소개되고 있었다. 한국은 서양식 차 문화가 많이 보급된 편은 아니다. 그런데 요즘 스페인 메이커 ‘야드로(Lladró)’로 대표되는 세라믹 인형이 유행이다. 차와 큰 관련 없이 그 예쁜 모양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자그맣게 귀여운 것들부터 눈부시게 화려한 대품까지 다양한 작품이 애호가들을 유혹한다. 난 이런 장식물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차 세트를 구비하고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이 큰 이유다. 심드렁하게 책을 넘기다가 멈췄다. 눈을 확 잡아끄는 도판이 보였다. 한 쌍의 강아지 인형이었다. 앞서 보았던 화려한 식기나 소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뭔지 모를 고졸한 매력이 나를 잡았다. 실제 개의 얼굴을 닮지도 않았다. 세세한 손길을 준 것 같지도 않았다. 눈은 개의 것이 아닌 사람 눈 같아 보인다. 몸통 표현도 대략 생략되어 있다. 머리와 몸의 비율도 맞지 않는다. 금색으로 목줄과 털의 포인트를 줬는데 툭툭 던진 붓질이다. 책에 소개 된 장인들이라면 훨씬 더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저렇게 만든 것 같았다. 신기한건 디테일도 부족하고 못난 얼굴인데 끌리는 매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쌍이 마주 보는 것도 아니고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도 웃음이 나왔다. 이런 강아지 소품을 스태퍼드셔 도그(Staffordshire dogs) 인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벽난로 지킴이
스태퍼드셔 도그 인형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19세기에 유행했다.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문화가 주류를 이루던 때다. 이 인형은 주로 주택의 난로 선반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hearth spaniels 또는 fireplace dogs, 다시 말하면 ‘난로 강아지’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1700년대부터 도자기 공장들이 많았던 스태포드셔 지역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인형의 모습과 구성은 느슨하나마 규범으로 정해져있었다. 단품이 아니라 쌍으로 앉게 만든다. 목에는 금 사슬과 펜던트를 장식한다. 주로 크림색의 흰 털을 바탕으로 만든다. 개의 외양은 주로 스패니얼 품종을 따른다. 그레이하운드 등 다른 개들도 많이 만들어졌지만, 스패니얼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이 인형은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부르주아들의 신분 상징 장식품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스패니얼 외형을 선호한 것은 신분 상승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이다. 당시 킹 찰스 스패니얼(King Charles Spaniel) 품종의 개는 왕족들이 주로 길렀다. 이름 자체가 영국의 찰스 2세 국왕에서 나왔다. 찰스 2세는 이 작은 개를 사랑해서 항상 같이 놀았다고 한다. 반대파들이 일은 안 하고 개와 시간을 보낸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부르주아들은 이런 상류층의 여유로운 생활을 동경했을 것이다. 아마도, 난로 위의 개를 보면서 귀족의 삶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재미있게도, 이 개의 이력은 부르주아가 상상했던 귀족의 생활에서 끝나지 않는다. 잠시 도자기 인형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쌍으로 앉아 있는 동물 조각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보자. 뭔가 떠오르는가? 광화문 앞 해태, 어떤가? 중국의 궁궐이나 권세 있는 집 앞에도 돌로 만든 사자(石獅)가 세워져 있다. 일본의 신사나 사원에 가면 ‘코마이누(狛犬/高麗犬, こまいぬ)’, 즉 고려의 개라고 부르는 돌 조각이 쌍으로 세워져 있다. 중요한 곳에 돌로 동물을 만들어 한 쌍으로 세우는 것은 이곳, 극동의 문화이다. 중국은 16세기부터 유럽을 겨냥한 수출용 도자기를 만들었다. 이 때 돌사자의 모양을 본 뜬 인형도 제작했다. 중국의 물건들이 세계 최고의 명품으로 대접받을 시기였다. 서양 예술에 중국풍을 따라하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가 유행했다. 영국 도자기 장인들은 이 중국 인형을 모방해서 초기 스태포드셔 도그를 만들어냈다. 영국의 귀족들은 중국의 화려한 문화를 동경하며 인형을 주문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현실의 개를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며 현지화 된 양식으로 만들어 졌을 것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모습이 부르주아 가정집의 난로 위에 오른다. 중국 왕실에서 시작된 것이 영국 귀족의 선택을 받아 부르주아의 취미에 맞게 발전한 것이다. 중국에서 권세 있는 자들을 상징하던 기호가 그 힘이 넘쳐 근대의 영국까지 갔다. 사치품은 이렇게나 힘이 세다.
역사를 바꾼 차
차는 힘이 아주 셌다. 차를 사랑한 귀족들은 중국을 망하게 했다. 19세기 영국과 청나라 사이 최대 교역품은 차였다. 홍차는 원래 귀족들의 문화였다. 차가 귀해서 자물쇠로 잠그는 티 캐디(tea caddy)에 보관할 정도였다. 차 문화를 일반 가정에서도 따라하며 필수품이 되었다. 가구 수입의 5% 정도를 차 구입에 썼을 정도였다. 당시 차는 중국에서만 나는 특산품이었다. 청나라는 재배법을 산업비밀로 엄격하게 보호했다. 영국은 폭등한 수요를 모두 중국에 의존해야 했다. 나중엔 무역액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거래 대금은 모두 은으로 지급되었다. 수출 우위에 선 중국은 점점 가격을 올렸다. 영국의 은이 빠져나가 국고가 비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영국 귀족들은 가장 비윤리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식민지 인도에서 만든 아편을 중국에 풀어 중독 시킨 것이다. 무역 수지는 역전되고, 중국 사회가 병들어갔다. 청나라는 이에 분노해 밀수 아편을 모두 압수해 불태운다. 영국은 이에 반발해 1840년에 아편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으로 종이호랑이 중국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지금은 마트에서 쉽게 사먹는 홍차가 거대한 역사를 바꾼 것이다.
차에 넣는 설탕은 무고한 노예들을 만들어냈다. 설탕은 사치품이었다. 하인들에게 티파티를 준비시켜도 설탕을 서빙 하는 것은 호스트의 몫이었다. 손님도 덩어리설탕을 집는 집게(sugar nippers)에 손대면 안 됐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고가의 설탕을 자랑하기 위해 설탕용기의 뚜껑을 덮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설탕을 못 쓰는 가정에서는 꿀로 단맛을 냈다. 당시 일상생활에서는 밀랍과 꿀이 늘 필요했다. 농가에서 양봉이 성행했다. 하지만, 설탕은 달랐다. 중세시대 아랍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만드는 기술이 들어왔다. 하지만, 유럽 기후에 맞지 않아 사탕수수를 키울 수 없었다.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신대륙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브라질이나 캐리비언 해역 섬들에 플렌테이션 농장을 열고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여기에는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본격적으로 노예무역이 성행했다. 수많은 흑인 노예가 신대륙으로 팔려갔다. 노동에 혹사된 노예들의 평균 생존 기간은 7년 정도였다. 잔혹한 단맛이었다. 18세기에 사탕무로 설탕을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사탕무는 유럽에서 재배할 수 있었고, 가공도 쉬웠다. 설탕 가격이 낮아지고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인간의 피땀을 쥐어짜 즐겼던 귀족의 단맛은 이제 가책 없이 쉽게 사는 생필품이 되었다.
일상 속 사치들
우리 생활용품에는 설탕과 차처럼 사치품이었던 것들이 많다. 비누의 긴 역사에서 일반인들에게 보급된 기간은 매우 짧다. 기원전 2,800년 전 바빌론에서 처음 비누를 만들었다. 그리스, 이집트에서도 비누가 만들어졌다. 이때 비누는 개인위생용이 아니었다. 조리도구를 세척하거나 의료용으로만 쓰였다. 근대 유럽 귀족들은 이 귀한 비누를 몸을 씻는데 쓰기 시작했다. 올리브유로 만든 비누가 유행했다. 특히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에서 만든 비누는 최상품으로 여겨졌다. 영국은 1712년부터 비누에 세금을 매겼다. 비누가격의 3분의 2가 비누세로 부과되기도 했다. 1791년 프랑스 화학자 르블랑이 비누를 쉽게 만드는 방법을 만들고서야 싼값에 팔렸다. 한국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1882년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비누의 가격은 일꾼들 하루 품삯보다 비쌌다고 한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저렴한 배달음식의 대명사가 된 중국음식도 과거엔 고급요리였다. 개화기 경성에서 영업하던 아서원, 대관원 같은 식당은 코스로 된 청요리(淸料理)를 제공했다. 식당은 대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2층 구조였다. 1층은 홀, 2층은 방으로 구성되었다. 부유한 일본인이나 조선인만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 밥상도 그렇다. 고기는 제사나 잔치가 있을 때나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고기로 배를 채우는 것은 엄청난 사치였다. 우리가 흔히 먹는 소주는 부유한 양반만 먹던 전통 소주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발효주인 청주도 귀했던 시절, 그것을 증류하여 만든 전통 소주는 호화로운 술이었다. 희석식 소주를 처음 생산할 때 그 고급스런 이미지를 가져왔다. 김일 선수가 박치기를 날리던 시절, TV는 동네에 한 대 있는 물건이었다. 긴 다리에 여닫이문이 있는 흑백 브라운관 TV는 마을의 극장 역할을 했다. 그랜저는 회장님만 타는 차였다. 에어컨이나 핸드폰도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우스운 것은 사치품이 생활 속에 녹아들면 그 강한 힘이 안 보인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힘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더 이상 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의 떡이 커 보였던 것이다.
살아남은 것과 사라진 것들
인간은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갈망한다. 신분 상승의 욕망은 늘 자신의 처지보다 더 나은 것을 쳐다보게 만든다. 그런 문화와 물건들을 부러워하고 따라한다. 이렇게 역사가 흐르며 사치품이 일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사치품의 생명력이 강한 이유는 이런 사회적 맥락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실용성도 갖춰주기를 요구했다. 이런 까다로운 취향과 그것을 맞추기 위한 장인들의 천재성이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다. 사치품이 일상에 녹아들 때는 미감보다 기능이 더 도드라진다. 지금 일상에 살아남은 사치들은 겉만 번지르르한 것들이 아니다. 처음엔 부러운 마음에 따라했을 것이다. 경험해 보고 ‘어 이거 괜찮네’ 싶었을 것이다. 해봤자 별거 아닌 것들은 조금씩 잊혀졌을 것이다. 조선시대 유행했던 가체(加髢)는 크기가 클수록 고급품이었다. 무게가 너무 무거워 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많이 났다. 비싼 가체는 기와집 몇 채의 가격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요즘 우리가 명품으로 떠받들고 있는 것에서 어느 것이 살아남을까? 힘이 없는 것은 사라질 것이다. 힘이 센 것은 일상품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없어지거나 일상품이 될 운명이라니, 허무한 느낌이다. 현대의 일상용품이 사치품이었던 옛날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어떨까. 그들이 보기엔 우리 모두 귀족의 생활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름 귀족놀이를 하며 사는 것 같아 살짝 웃음이 난다.
책에서 본 스태퍼드셔 도그 인형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난로를 지키는 개라니, 거실 벽난로 옆에 두면 딱 맞을 것 같았다. 국내에는 찾아지지 않았다. 해외를 뒤졌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과 합리적인 가격을 맞추기 위해 한참을 검색했다. 에스토니아에서 적절한 물건을 하나 찾았다. 바로 주문했다. 직접 받아 보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유쾌했다. 외양은 별로 있어 보이지 않는데, 왠지 모를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난 귀족도 아니고 자본가도 아니다. 월급쟁이 노동자일 뿐이다. 그래도 중국 왕실에서 시작된 그 개의 힘이 아직 남아있나 보다. 별 쓸모는 없지만 이런 노동자의 눈을 즐겁게 하는걸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