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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PD Jun 17. 2024

전문가는 전문가다


미식가들의 나라 

    

 한국 사람들은 먹는 것에 참 관심이 많다. 한 끼를 먹어도 제대로 해야 한다. 나도 그렇다. 한창 바쁘게 일하던 때에는 먹는 것 외에 내 여유를 빛내줄 일을 찾기 힘들었다. 분단위로 촘촘히 짜인 방송 스케줄들을 소화해야 한다. 정신없는 중에 잠시나마 마음을 풀고 즐거울 수 있는 시간은 먹을 때 뿐 이었다. 여기저기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찾아내는 것이 일이었다. 방송국 주변은 물론이고 멀리 촬영을 나가도 마찬가지다. 같이 나간 스태프 중에 맛있는 식당을 꿰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으면 그렇게 맘이 든든할 수 없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지도책을 펴서 다니던 때였다. 당연히도 지도에 맛집은 표시되어있지 않았다. 어디서 뭘 먹을지 모를 때 이런 구세주가 없다. 긴장과 피로를 잠시 내려놓고 음식에 집중한다. 식재료, 양념 특성, 식당 분위기 등등을 꼼꼼히 따져보며 내 마음속 맛집 리스트에 올릴지 여부를 판단한다. 이렇다 보니 방송국 다니는 놈들은 입맛 까다롭단 얘길 듣는다. 더욱이 맛집을 소개해야 하는 것이 일인 TV아닌가. 전국단위로 식당 리스트를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꽤 많았다. 저기는 KBS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 저기는 MBC, 저기는 SBS... 이런 식의 ‘나와바리’가 있기도 했다. 찾아가기도 힘든 골목 안, 간판 없이도 사람이 미어터지는 식당 등 어디서 알아냈는지 모를 곳을 찾아다녔다.

 요즘은 괜찮다는 식당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경험이 다양해진 후 식당의 수는 물론 음식의 종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스타 쉐프가 나오는 프로그램도 유행했다. ‘맛있는 식당’에 ‘제대로 만드는 요리사’라는 개념이 추가되었다. ‘맛있는 음식’이라는 조금은 추상적인 개념에서 ‘유명인이 만들어 주는 특별한 음식’이라는 더 구체적인 개념으로 발전한 것이다. 변한 인식은 주위를 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유명한 일식집에서 오마카세를 십 수만 원을 훌쩍 넘는 가격으로 먹는다. 짜장면에 투플러스 등급 한우 스테이크를 올리고 생트러플을 저며 얹는다. 발사믹 식초의 원산지와 빈티지를 따져 맛을 고른다. 강한 미식 욕구가 먹는 전문성과 묘하게 얽히고 있다. 괜찮다는 식당엔 한두 시간씩 줄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꽤 비싼 가격이어도 꼭 먹어야 한다면 용서가 된다. 옛날엔 듣도 보도 못 한 식재료들을 만난다. 분야마다 까다로운 미식가들이 넘쳐난다. 눈에 띄는 특징 없이는 맛집이라고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집밥과 코로나     


 집에서 음식을 다양하게 해 먹는 편이다. 닭볶음탕, 소꼬리찜, 잡채, 육회, 각종 전 같은 단품류 한식이나 불고기, 김치찜, 된장국 등 일상 식사용 음식은 자주 상에 오른다. 각종 채소와 파인애플을 채 썰고 고기는 따로 볶아 피시 소스와 함께 내는 월남쌈은 날 더울 때 먹기 좋다. 종이호일 위에 호박, 감자, 양파, 당근 같은 야채를 깔고 마늘버터를 잔뜩 바른 닭 한 마리를 올려 오븐에 구워내면 와인과 먹기엔 안성맞춤이 된다. 숯을 피워 180도로 예열된 바비큐 그릴에 스크럽을 꼼꼼히 바른 삼겹살을 넣고 한 시간 구우면 훈연향 가득하고 살살 녹는 고기가 된다. 쯔유 육수에 덩어리 무를 푹 익힌 후 각종 어묵을 넣어 끓이면 따뜻한 청주를 마시기에 제격이 된다. 돼지고기 전지를 하루 정도 수비드 해서 오븐에 구워내면 기름기가 쏙 빠진 풀드포크 완성이다. 제철음식도 빠지지 않고 챙겨 먹는다. 봄이 막 시작되는 때엔 새조개와 주꾸미를 사서 샤브샤브를 한다. 야들야들한 해산물을 먹다 진하게 우러난 국물에 국수를 삶으면 배가 터질 것 같지만 멈출 수는 없다. 겨울에는 동네에 있는 방어 맛집에 예약을 걸어 기름이 오를 대로 오른 촉촉한 방어회를 받아 와 먹는다. 물에 씻은 묵은지나 김과 함께 싸먹으면 제철음식의 가치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코로나19로 바깥출입이 어려워진 후 집에서 해먹는 빈도가 한층 높아졌다. 아무리 집밥이라도 비슷한 음식을 자주 먹으면 물리는 법이다. 새로운 음식들에 도전하게 됐다. 워낙 다양한 메뉴를 먹는 집이었는데, 그 가짓수가 더 늘어났다. 몇몇 메뉴들은 좀 더 전문적인 도전을 해보기도 했다. 알리오올리오 베이스의 고등어 파스타, 봉골레는 누구에게나 자랑하는 우리 집 대표 메뉴이다. 편마늘을 올리브 오일에 볶는다. 바다향이 잘 나도록 엔초비도 아낌없이 넣는다. 칼칼하게 맛을 잡아 줄 페퍼론치노도 적당히 넣고 볶다가 살짝 구워 둔 고등어나 알이 큰 조개를 넣는다. 화이트와인을 넣어 잡내를 잡고 단맛을 올려준다. 여기에 삶은 파스타와 면수를 넣어 소스가 잘 배도록 볶는다. 취향에 따라 통후추를 좀 갈아 내거나 파슬리를 얹어 마무리한다. 내 생각엔 라면을 끓이는 것보다 살짝 더 신경 쓰면 될 정도의 쉬운 음식이다. 하지만,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써서인지 밖에서 파는 웬만한 식당보다 맛있다. 이 간단한 레시피에서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만들 방법을 찾아내고 싶었다. 다양한 엔초비를 사서 실험을 해봤다. 올리브유를 엑스트라버진으로만 해보기도 하고 다른 기름과 섞어서 볶아보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면을 고르는 것이었다. 집근처 레스토랑에서 면의 표면이 살짝 거친 파스타를 먹어 본 적이 있다. 소스가 면과 너무 잘 어울려 깜짝 놀랐었다. 수제면이냐 물었더니, 좋은 제품으로 사오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비밀 레시피인지, 정확한 답은 피했다. 그 기억을 더듬어 비슷한 면을 찾으려고 한동안 몰두했었다. 처음엔 굵기에 비법이 있나 싶었다. 얇은 카펠리니에서 좀 두꺼운 페투치네로 또 그 사이에 있는 스파게티니까지 사용해봤다. 성에 차지 않아 원재료를 파보았다. 듀럼밀로 만든 세몰리나 원료의 파스타를 몇 가지 요리해봤다.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글루텐 함량이 높아 쫄깃한 식감이 좋았다. 하지만, 그 맛은 아무리 해봐도 나지 않았다.           



제면 도전기     


 결국 면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건면에서 부딪힌 벽을 생면으로 넘어보고 싶었다. 생면파스타를 먹어 보면 면이 탱탱하고 고소하다. 파스타 생면은 달걀노른자를 사용해 반죽한다. 달걀 단백질로 만들기 때문에 흐물거리지 않고 맛도 담백하다. 마음을 먹고 필요한 재료와 도구를 찾아보았다. 밀가루는 강력분을 써야 했다. 일정한 면을 뽑기 위해서 제면기도 샀다. 결전의 날, 반죽을 시작했다. 밀가루를 작은 산처럼 쌓고 가운데를 푹 꺼트려 분화구 모양이 되게 만든다. 거기에 노른자, 올리브유, 소금을 넣는다. 포크로 조심스럽게 저어 재료를 섞는다. 점점 밀가루가 뭉치면서 묵직한 질감이 만들어진다. 손으로 치대서 반죽을 완성한다. 숙성도 아주 중요하다. 재료들이 하나로 합쳐지도록 기다린다. 이제 제면기를 꺼낸다. 제면기의 한쪽은 원하는 두께의 반죽이 될 수 있도록 조절할 수 있는 롤러가 있다. 다른 한쪽엔 두 가지 굵기의 면을 뽑아내는 톱니 모양의 롤러가 있다. 먼저 반죽을 만드는 롤러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고 핸들을 돌린다. 처음 다뤄보는 기계 앞에서 어설픈 손길이 반복된다. 반죽을 접으며 돌리기를 몇 번 하니 노랗게 예쁜 색이 매끈하게 보인다. 이제 면으로 만들 때가 된 것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면을 뽑았다. 모양은 합격점이었다. 끓는 물에 삶아 파스타를 완성했다. 두근두근... 맛을 본다. 아, 내가 생각했던 맛은 아니다. 고급스런 느낌은 있지만, 쫄깃하지 않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제면기를 샀으니 놀릴 수는 없었다. 우동면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름난 우동집에 가보면 쫄깃한 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낀다. 어릴 때는 우동이라고 하면 중국집에서 먹는 것인 줄만 알았다. 지금 우리가 우동이라 부르는 것은 오히려 가락국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어느 때인가부터 정통 일식 우동이라는 이름을 걸고 가쓰오부시 국물의 면이 팔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말린 가다랭이의 훈연향과 달큰한 간장 국물이 색다른 미식 취향으로 소개됐었다. 일본식 우동집이 점점 많아지면서 맛의 승부처가 국물에서 면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뚜걱뚜걱한 면은 식감도 좋지 않고 국물과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 잘 만든 우동면은 쫄깃한 식감은 물론 매끈한 면에 육수가 잘 배어 먹는 즐거움이 있다. 집에서 육수로 쓰는 쯔유를 만들어 본 적이 있었다. 멸치, 디포리, 다시마 등을 물, 간장과 함께 넣고 끓인다. 각종 채소를 그을려 불맛을 입힌 후 끓는 육수에 추가한다. 맛술, 설탕을 넣어 단맛을 낸다. 맛이 날 정도로 끓으면 불을 끄고 가쓰오부시를 한 줌 넣어 완성한다. 집에서 만든 쯔유는 사서 먹는 것과 달리 잡스런 맛이 나지 않는다. 우동은 물론 일본식 덮밥이나 오뎅을 끓일 때도 쓸 수 있다. 쯔유를 만들 수 있으니 면까지 제대로 만들 수 있으면 완벽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밀가루에 소금을 섞고 물을 조금씩 가해서 반죽한다. 너무 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에서 시작해서 윤기가 돌 때까지 손으로 반죽한다.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비닐에 넣어 발로 밟는다. 접고 밟기를 반복한 후 숙성시킨다. 그리고 제면기를 꺼낸다. 긴장된 마음으로 핸들을 돌린다. 끓는 물에 조심스레 뽑은 면을 넣는다. 준비된 국물과 담아 완성한다. 결과는? 아, 이놈도 내가 생각한 맛이 아니다. 생면파스타도, 족타 우동도 식당에서 먹던 맛이 나지 않았다.       

    


남이 하면 쉬워 보인다     


 집에 손님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 많다. 오는 사람들의 취향, 그날 마시는 술, 계절과 날씨 등을 고려해서 메뉴를 정한다. 대접 받는 입장에서 공치사가 크겠지만, 모두들 만족해한다. 몇몇 요리는 밖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다고 장사를 하라고까지 한다. 장사를 할 마음은 없지만, 식당을 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을 해본 적은 있다. 매일 일정한 맛이 나도록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프로가 가져야 하는 한방이 없다. 엇비슷하게 따라갈 수는 있어도 결정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디테일이 있기 마련이다. 생면파스타도 직접 만든 우동도 보기엔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먹어 보면 바로 안다. 유명한 집은 뭔가 비법이 있구나.

 막상 해보면 뭐든 쉬운 건 하나도 없다. 처음 입사해서 프로그램을 만들 때 신경 쓸 것이 그리 많은지 상상도 못 했다. 좋은 아이디어, 촬영에 대한 노하우, 현장 장악 능력, 편집에 대한 감각, 자막이나 음악에 대한 센스 등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어느 한 단계라도 허술하면 시청자들이 바로 알아챈다. 문화사업 분야에서 일하며 공연을 제작할 때도 그랬다. 제대로 된 대본과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한 한 가지 단계가 끝나는 일일 뿐이었다. 적절한 배우를 캐스팅해야 한다. 원하는 시기에 좋은 위치의 극장을 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적절한 수준의 제작비를 맞춰야 한다. 공연 개막 후에는 티켓을 팔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마케팅 계획을 수정하고 실행하는 일을 해야 했다. 밖에서 쳐다보는 사람들은 ‘뭐 이래이래 하면 되는 거 아냐?’하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직접 마주하는 현실은 다르다. 겪어보지 못 하면 알 수 없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사실 밥벌이를 하는 모든 일이 그렇다. 남에게 돈을 받는 일은 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에 누가 대가를 주겠는가? 늘 기대치에 부응하는 일정한 결과물을 내는 것은 보통 노하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작가가 이렇게 적었다. “남이 하는 일들이 쉬워 보인다면, 그 사람이 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어긋나도 지적질을 해대는 세상이다. 남들이 알 수 없는 큰 내공이 쌓이지 않고서 늘 무리 없이 일을 해내지 못 한다. 그렇게 일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가치를 자기도 모르는 새에 몸에 지니게 된다.          



괜히 전문가가 아니다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 하는 일에 탄성이 나올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전문가들이다. 맛있는 우동 한 그릇으로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오랜 시간 노하우를 쌓은 사람만이 누구나 만족하는 쫄깃한 파스타를 반죽해 낼 수 있다. 하지만, 눈에 띄는 전문가 말고도 우리가 일상을 무리 없이 살 수 있게 해주는 전문가들도 많다. 지하철 운전사, 환경미화원, 택배 배달원 같은 분들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늘 거기 있기 때문에 우리가 평범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의 노하우가 없으면 당장 우리의 안전과 일상이 무너진다. 쉬운 일로 비칠 수 있지만, 그들이 잘 하지 못 하는 순간 나의 하루가 망가진다. 그들이 전문가이기 때문에 내가 편안히 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겐 이렇게 보이지 않는 전문가들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엄청나게 귀하고 멋진 요리를 만드는 쉐프만이 전문가는 아니다. 주머니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은 흔하지 않다. 특별할 것 없어 보여도 우리가 모르는 노하우로 음식을 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 이유 없이 한 자리에서 꾸준히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는 괜히 전문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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