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 못할 거 있어?

[chapter 5 딴짓하는 의대생, 조금씩 환자에게로]

by 이진규


타고난 천재는 분명히 있다.

한번 스쳐 지나간 내용도 머리속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친구들이 있다. 교수님이 수업중에 지나가듯 던진 한마디조차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귀신 같이 기억해내는 이들도 있다. 과학고에서도, 공대에서도, 의대에서도 그런 친구들은 늘 있었다. 나에겐 없는 그들의 능력을 볼때마다 부럽기만 했다.


그런데 의대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이전과 또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논술형 문제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두 줄 길이의 문제를 두고 가만히 앉아 머릿속에서 논리를 전개시키며, 마치 얽힌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가듯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문제를 A4 용지 위에 차근차근 펼쳐 나간 뒤, 용지 끝자락에 결론과 정답을 적을 때면 묘한 희열을 느꼈다. 마치 문제와 나만이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의대에서 그런 여유는 사치였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수십, 수백 페이지의 강의자료, 그리고 쉴 틈 없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교수님들의 강의를 소화해야 했다. 공대에서의 커피가 주말 아침, 느긋하게 즐기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같았다면, 의대에서의 커피는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다음 버스가 오기전 허겁지겁 들이켜야 하는 편의점 아이스 커피 같았다.


문제 유형도 전혀 달랐다. 이제는 논술형이 아니라, 5지 선다형 문제였다. 다시 말해, 찍는 문제였다. 나는 ‘찍는다’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았다. 빈 종이에 한 줄짜리 공식을 적고 변수를 정의하고, 주어진 조건을 대입하고, 문제의 요구에 맞게 상황을 치환하며 한 줄 한 줄 논리를 전개해가는 방식이 내게는 익숙했다. 하지만 이제는 빠르게 읽고, 정답을 고르고, 곧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짧게 인사만 나눈 채 떠나야 하는 듯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불평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고,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시곗바늘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참석한 학교 행사의 이름부터 심상치 않았다. ‘골학캠프’, 입학 전, 의학용어와 뼈에 대해 배우는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5일간 책 한권 분량을 통채로 공부해야 했고, 매일 쪽지시험도 있었다. 아침마다 선배들 앞에서 뼈 모형을 들고 전날 배운 내용을 설명하는 시간도 있었다. 결연한 각오로 시작했지만, 좀처럼 외워지지 않는 괴상한 단어들과 처참한 시험 성적, 그리고 별것 아니라는 듯 척척 기억해내는 동기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의대에 맞는 사람일까? 내가 잘못 온 건 아닐까?’


공대생 시절, 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나보다 먼저 의대에 입학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지어 골학캠프에서 전체 1등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슬프게도, 내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아프지만 인정해야 할 현실이었다. 그래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단거리 달리기 선수가 아니라 마라톤 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목표는 제일 먼저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완주하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이었다.


골학캠프 마지막 날 열린 시상식. 아쉽게도 개인 성적 1등으로 강단에 서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강단에 올랐다. 우리가 조별 성적 1등이었기 때문이다. 대표로 마이크를 잡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선 순간, 의대에 입학한 나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혼자는 어렵지만, 함께라면 해낼 수 있다고. 여기는 그런 곳이라고.


하지만, 골학캠프는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고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첫번째 고비는 조직학 시험 전날 저녁이었다. 오늘도 8시간을 꽉 채워 수업을 듣고 왔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매순간 집중했다. 집에 도착해 푹신한 침대에 몸을 잠시 맡겨본다. 당장 눈을 감고 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몇 시간 후면 시험이다. 그래도 매일같이 복습하고 노트정리도 해왔다. 땀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책상에 앉아 기출문제를 훑어본다. 시험 범위를 이미 한번 공부했고 수업도 열심히 들었으니 익숙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건 처음 보는 내용인데...수업시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


뭔가 잘못되었다. 이건 아니다. 분명 한번 봤는데, 모든 것이 새롭다. ‘혹시 시험 범위를 잘못 알고 있었나?’ 여러 번 확인해본다. 범위는 틀리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노트 정리를 살펴본다.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긴 한데, 기출문제의 내용은 없다. 심장이 쿵쾅대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온 몸의 머리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쳐다본다.


10시간, 내일 아침 시험장에 들어가기까지 남은 시간이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10시간이면 충분하다. 첫 강의록부터 다시 시작한다.


9시간, 벌써 시침이 한 칸이나 움직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다. 강의록은 너무 많았고, 이 속도로 읽다가는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분명 공부를 했는데 돌아서면 까먹는다. 심지어 방금 본 강의록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심장은 여전히 쿵쾅대고, 손에 들린 강의록은 파르르 떨리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리셋이다. 컴퓨터에서 메모리가 충돌하면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듯, 내 머리도 재부팅이 필요했다.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눈을 감고 양을 세기 시작했다. 심장은 여전히 세차게 뛰었지만, 양이 열 마리 정도 뛰어다닐 때쯤 점점 잦아들었다.


7시간, 휴대폰 알람이 다급하게 나를 깨운다. 눈이 번쩍 뜨인다. 머리가 개운하다. 이상한 자신감이 차오른다.


‘다들 잘들 하는데 나라고 못할 거 있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오면 되지, 뭐.’


이해할 수 없이 솟구친 용기에 벌떡 일어나 기출문제집을 집어 든다. 처음보는 내용이면 어떻고, 이해가 안 되면 또 어떤가. 처음 보는 내용이면 일단 눈동자에 바른다. 이해가 안가면 외우고 본다. 7시간 뒤 시험지 위에 내려놓고 오면 그만이다. 그렇게 홀린 사람처럼 500페이지 분량의 기출문제 모음집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교수님이 수업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을 시험에 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기들이 기출문제를 먼저 본 뒤, 그 내용을 기준 삼아 강의록을 본다고 했다. 어쩌면 의대 환경에서 효율적인 학습 방법은 그쪽에 가까웠다. 내 방식만 고집했던 내가 바보였다.


다행히 등록금을 두 번 내는 일은 없었다. 기출문제를 여러 번 보다 보니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 시험 문제도 비슷한 패턴으로 나왔고, 교수님들이 숨겨놓은 정답은 조용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


타고난 천재가 아니어도 괜찮다. 뛰어난 그들을 보며 슬퍼할 필요도, 좌절할 이유도 없다. 누구나 처음은 서툴다. 그들도 그랬다.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 삶을 어떻게 마주하는가다.

오늘도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되뇌인다.


‘나라고 못할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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