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딴짓하는 의대생, 조금씩 환자에게로]
의사는 매일 전쟁터에서 일한다.
그들은 질병과 싸운다. 병마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환자들을 볼모로 잡고, 의사는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 치열하게 맞선다. 그래서 무장해야 한다. 빗발처럼 쏟아지는 질병의 공격과 예고 없이 터지는 폭탄 같은 응급상황에 대비하려면,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새로운 총알과 더 강력해진 폭탄이 날아들어 쉴 틈이 없다. 의사들이 항상 바쁘고 매일같이 공부하는 이유다.
하지만, 사람은 한순간에 변하지 않는다. 수년간 조금씩 다듬고 고쳐야 비로소 온전한 형태를 갖춘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의대생 때부터 잔혹한 훈련이 시작된다.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한 명의 환자라도 더 구할 전사를 만들려면 혹독한 교육이 필수다.
촌각을 다투는 긴장된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서 공부도, 시험도 그렇다. 한 학기에만 십 수개의 과목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없이 매주 시험을 치른다.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일정 속에서 어느 순간 깨닫는다. 흰 가운 안주머니에, 질병과 싸울 탄환들이 하나둘씩 채워지고 있음을.
그제야 비로소, 전쟁에 나갈 준비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의학은 사람을 향한 학문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수많은 갈래로 나뉘지만, 출발점은 모두 같다.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네 모습이 보인다. 엄마가 처음 엄마가 되던 순간부터 아장아장 걷던 어린 시절의 나, 어리숙했던 동네 형,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의 모습까지. 모두 우리 이야기다.
산부인과 수업을 듣다가 가슴이 뜨거워졌다. 살아있다는 것, 숨을 쉰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산모와 태아가 함께하는 눈물겨운 팀 프로젝트를 보며 ‘오늘’이라는 순간이 얼마나 기적적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 여자가 엄마가 된다는 것은 경이로운 과정이다. 여자가 산모가 되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 당뇨 환자가 된다. 보통 사람은 배고플 때 음식을 먹으면 혈당이 올라가고, 인슐린이 분비되어 혈당을 낮춘다. 건강하려면 혈당이 높으면 안 된다. 그런데 산모의 몸은 다르다. 배고프면 더 배고파지고, 배가 불러도 혈당을 쉽게 떨어뜨리지 않는다. 마치 일부러 혈당이 높인 채 일부러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건강에 분명 해롭지만, 그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는 단 하나.
‘아기에게 밥 주기.’
엄마도 사람이다.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언제나 본능적으로 자신을 우선한다.
하지만, 엄마는 다르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해치면서까지, 뱃속 작은 생명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 그 선택은 출산 이후에도 계속된다. 코딱지만 한 세포였던 순간부터, 태아가 되어 자라는 내내,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후에도 엄마의 마음은 언제나 여전하다. 언제나 같은 질문을 건넨다.
‘아가, 밥 먹었니?’
사는 게 쉽지 않다지만, 태아도 마찬가지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처절한 여정을 지난다.
눈곱보다 작은 배아시절, 태아는 엄마의 혈관을 찢고 들어가 태반을 만들고 혈류를 확보한다. 그렇게 9주를 버틴 후에야 비로소 팔다리를 파닥파닥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후 약 8개월 동안, 살아남기 위한 사투가 이어진다. 떠다닐 양수가 부족해도 안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양막이 터져버려도 안 된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도 태아는 끊임없이 살아가려 애쓴다.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다.
그렇게 엄마 뱃속에서의 시간을 버텨낸 후,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볼 때조차 끝이 아니다. 좁디좁은 산도를 빠져나오기 위해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돌리고 숙이며, 양쪽 어깨를 순서대로 으쓱거려야 한다. 그리고 바깥공기를 처음으로 들이마신다. 그러나, 아직 덜 펴진 폐는 공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질식할 듯한 고통이 몰려온다. 목 놓아 울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수많은 순간들을 넘어선 증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기적이다. 착상부터 40주간의 임신 과정, 출산의 순간,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전, 수십 년간 남처럼 지냈던 정자와 난자가 마주친 그 순간부터, 삶은 신비한 우연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안정하다. 어느 것 하나 정해진 것 없이 흔들리고 휩쓸린다. 그러나 한없이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정답만을 선택한 길 끝에 온전하게 살아 있는 지금의 내가 있다.
그렇기에 오늘은 값진 선물이다. 우리가 아등바등 살아낸 하루는, 비록 한없이 고되고 힘들었을지라도, 수많은 기적이 겹치고 겹쳐 얻어낸 것이기에.
그렇게 가슴이 뜨거워져 주변을 둘러봤을 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 산부인과 수업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