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보내는 삶, 멈추지 않는 마음

[chapter 5 딴짓하는 의대생, 조금씩 환자에게로]

by 이진규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한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이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에 따르면, 인간의 이기심은 본능에 가깝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바로 그 이기적인 존재다.


누군가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하거나 큰 재산을 기부했다는 소식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선한 영향력’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행동과 가치관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좋은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기적인 인간에게서, 황무지 같은 영혼에서 선한 영향력이 흘러나올 수 있을까?


안 되면 되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하기 어려우면, 그런 척하며 살아가면 된다. 행동이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이 나를 변화시킨다. 한없이 이기적인 나지만, 선한 척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시작된 선행은 선한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은 물감이 물에 번지듯 천천히 나를 물들인다. 어느새, 이기적인 내가 선함으로 장식된 옷을 걸친 채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보며 선하다고 말한다. 놀랍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지금, 여기, 바로 오늘부터 해야 한다.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비록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학생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한 일들을 찾고 싶었다. 삶의 중심을 잃고 싶지 않았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다. 잘 모를 때는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도움을 구하면 된다. 그렇게 대한민국 인재상 담당 부서인 대구시 청년정책과 과장님을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올해 수상자 이진규입니다.”

“안 그래도 한번 뵙고 싶었어요. 바쁠 텐데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다름이 아니라, 수상자들과 함께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보고 싶어서 조언을 구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고 했던가. 과장님은 내 생각에 공감하며 다른 수상자들과 연결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같은 주파수에 맞춰진 라디오처럼, 수상자들 다섯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의대생부터 화학 국가대표, 생물 국가대표 고등학생, 초등학교 교사, 사회복지사까지, 다양하고 신선한 조합이었다. 우리는 모두 미숙했지만, 가슴속에 선한 꿈을 품고 있었다. 지나온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발판 삼아 다른 사람을 돕는 방법을 함께 고민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처럼, 우리는 지역 사회복지센터를 찾아가 멘토링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초등학생과 일 대 일로 매칭되어 매주 만나 아이들이 평소 해보고 싶었던 체험을 함께 했다. 우리는 아이들과 손을 잡고 그들의 꿈을 찾아가는 길을 함께 걸었다. 몇 발자국 먼저 걸어본 선배일 뿐이었지만, 아이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쁨은 더없이 소중했다.


“선생님들, 혹시 저희 센터에서 강연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이들과 사계절을 함께 보낼 즈음, 다른 사회복지센터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사회복지학과 대학생들에게 우리가 걸어온 삶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우리는 흔쾌히 수락했고, 각자의 짤막한 인생스토리를 담은 강연을 준비했다.


“진규야, 그런데 우리를 뭐라고 소개할 거야?”


강연을 함께 준비하던 사회복지사 친구가 물었다.


“인재상 수상자들이 만든, 스스로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 ‘인스타’ 어때?”


단체명까지 정한 김에 제대로 시작해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활동이 한순간 환하게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불꽃이 아니라, 자리를 지키며 은은하게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 같기를 바랐다. 그래서 비영리 단체를 만들었다. 정관을 작성하고 회의록과 명부를 준비해 비영리 법인 사업자등록증명 서류를 발급받았다.


‘인스타’라는 뿌리를 내린 이후, 봄날의 신록처럼 우리는 점점 멀리 손을 뻗어 나갔다.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하며 더 많은 가지가 돋아났다. 변호사부터 아나운서, 개발자, 간호사, 스타트업 대표까지. 다채로운 가지들이 뻗어 나는 만큼, 우리의 이야기도 싱그러운 나뭇잎처럼 풍성해졌다.


가지 끝에 매달린 각양각색의 열매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집 근처 유원지에서 쓰레기를 주웠던 날, 거센 바람 속에서 겨울철새에게 먹이를 주던 날, 학교 밖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경험을 나눴던 날, 전국의 인재상 수상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네트워킹 행사를 열었던 날까지. 모두 우리의 땀과 정성이 배어든 크고 작은 열매들이었다.


물론 혹독한 추위와 비바람에 흔들릴 때도 있었다. 사람이 많아지면 목소리도 많아지는 법이다. 날이 선 말들은 겨울바람처럼 마음을 베어내고 상처를 남긴다.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이들 앞에서 움츠러든 나의 진심은 희미해졌고, 그 자리에 남겨진 건 깊은 생채기였다.


그럼에도 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누구나 살다 보면 맞닥뜨리는 힘든 순간에도, 삶의 거센 폭풍에 마음속 등불이 약해지더라도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냈다. 상처받아 떠난 구성원들이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따스한 봄날이 찾아와 얼어붙은 마음에 새싹이 돋을 때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나는 흘려보내는 삶이 좋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사실 어딘가로부터 흘러 흘러왔다. 시간이라는 강물 위에 차곡차곡 쌓은 경험과 지식, 그 어느 것도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적은 없었다. 이제껏 받아온 사랑도, 배운 것도, 결국 누군가를 돕기 위해, 흘려보내기 위해 내게 주어진 선물이라 믿는다.


멋지게 사랑할 힘 따위 내겐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로 이어지는 통로로 살고 싶다.

아낌없이 흘려보내는 사랑의 통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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