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부산의 영도에는 봉래산 할매 산신령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집 뒤편에 있었던 봉래산에 할매 산신령이 있는데, 영도에 살았던 사람은 반드시 다른 곳으로 이사를 나갈 때 영도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먼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면 할매 산신령이 저주를 내린다고 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언젠가 이사를 가게 될 때 영도가 보이는 곳으로 가면 어쩌나 엄청 멀리 가야 할 텐데 하며 걱정하곤 했다. 어디쯤 넘어가면 여기가 보이지 않을까? 저기를 넘어가면 서울일까? 가장 먼 곳이 서울 일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나는 눈에서 보이는 가장 먼 곳이 서울이라고 생각했다.
영도도 일종의 섬이라서 보다 멀리 떨어진 육지를 동경하는 마음에 생겨난 미신이었을까? 암튼 나에겐 그 이야기가 내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겐 집 앞 공터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제법 넓은 빈 곳이었는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런저런 꽃들도 피고 잡초도 무성해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약간 경사가 있어서 주르륵주르륵 미끄럼을 타다가 또 올라오고 하다 보면 신이 났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르락 내리락을 하면 얼굴과 손엔 때꼬장이 묻고 엉덩이나 무릎에 구멍이 나기 일쑤였다. 덕분에 내 무릎에는 항상 아까징끼 라고 부르던 빨간약이 발라져 있었고, 엄마는 나를 쥐어박고 욕을 하면서도 아까징끼를 다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넉넉히 쟁여 두었다.
그 공터에서 어느 날, 이곳에도 이름이란 걸 한번 붙여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넓은 곳 하면 태평양 그리고 난 외가 친가 할 것 없이 할아버지들을 본 적이 없으니 할아버지.
그래 여긴 나만의 태평양 할아버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이유지만 나는 거기를 태평양 할아버지라 부르기로 했다. 이름을 붙이고 나니 괜스레 내 것이 된것마냥 더 좋아졌다. 매일 가서 돌도 던지고 뒹굴고 미끄럼도 타면서 놀다 보면 , 저녁놀이 부산항 바다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구름이라도 사알짝 낄라치면 구름과 노을이 서로 깍지를 끼고 춤추는 것만 같았다. 그들만의 댄스파티를 구경하는 관객이 된 나는 , 무릎은 깨져서 피가 나도 덩달아 신이 났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는 걸 알기에 더 더 그 장면에 몰입하고 있었던 건지도..
그러나, 나만의 태평양 할아버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어느 날 드릴이 두르르르 두르르르 하며 땅 파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그 빈터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시멘트를 나르는 노가다 아저씨들이 수 십 명 왔다 갔다 하더니 나의 태평양 할아버지는 사라지고 철근과 시멘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의 꽃들과 잡초와 함께, 내 몸과 영혼은 갑자기 갈 곳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주변만 자꾸 서성였다.
생각보다 아파트 공사는 더디었다. 차라리 빨리나 해 버릴 것이지. 감질나게 조금씩 사라지던 나의 태평양 할아버지 때문에 공허함도 꽤나 오래 지속되었더랬다.
훗날, 영도를 떠날 때 우린 다행히 영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이사 간 이후 그곳을 다시 가본 적은 별로 없다. 몇 년 전 우연히 다시 갔을 때는 도저히 우리 집도 태평양 할아버지도 어디였는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그저 여기쯤이었지라고 짐작될 뿐.
내 어린 날, 친구가 되어준 태평양 할아버지와 저녁놀과 구름들, 그들이 어딘가에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면 난 알아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