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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영 Oct 16. 2024

                     내 무의식의 방엔

               춘향이가 되고 싶은  향단이가 있다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 8시경에 우리는 가끔 통화를 한다.  그날은 전화기 너머로 상기된 언니의 목소리.

오랫동안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전하며 감격하는 언니와 함께 나도 덩달아 가슴이 뛰었다.


  한 시간 여의 통화가 끝나고  부웅  떠있던 내 마음이 슬로모션으로 찬찬히 내려왔다. 그런데, 있던 곳에 착륙하지 않고 깊고 깊은 바닷속 같은 심연으로 더 느리게 내려갔다.

'어!  어디 가는 건데?'  당황스러웠다.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마침내 도착한 마음은 나를 마주 보지 않고 바닥만 응시했다. 그  옆에 가만히 앉아있어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미동도 없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린다.  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은 어릴 적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언니는 몸이 무척 약했다. 5살 때 뇌수막염이라는 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었고, 부모님이 몇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신 끝에 어떤 한의사를 만나 침을 맞혀서 겨우 살렸다 한다. 그래서  몸에 좋은 건 다 갖다 먹이곤 했다.


  요구르트를  집으로 배달받던 시절, 새콤달콤 찐득한 그 맛은 새로웠다. 엄마는 그걸 비싸다며 언니에게만 먹였다.

매일 아침 배달이 오면 그걸 쏙 빼내던 언니의 가느다란 손.

손은 웃고 있었다. 나도 웃고 싶어서 작전을 짰다.  작전명 요구르트 훔쳐먹기. 다 먹으면 들통나니까 바늘로 다섯 번 정도만 찔러서 쭉쭉 빨아 맛을 보고는 다시 제자리에 몰래  갖다 놓았다. 혀가 단 맛으로 어리어리했지만 속은 후련하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그 무렵  나는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뭔가를  끄적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언니는 아프니까"를 달고 살던 엄마는  "그러니까 네가 좀 해. 에고 착한 내 강아지. 어찌 이리 착하노"  라는 대사를 반복했다. 그 말은 나에게 달콤한 족쇄가 되었다. 약한 언니를 위해 씩씩한 동생은 원더우먼이라도 되어야 했을까?

실제로 난 대체로 부모님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도 자알 하는 아이였다.


  우리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당시는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다. 희고 여리여리했던 언니는 가끔 쫓아오는 남학생들 때문에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가서 자길 데리러 오라고 집으로 전화하곤 했다.  그럼 역할을 충분히 해야 했던 나는 바로 출동했다.  원~더~우~먼!!   빙그르르 돌면  빨간색 별무늬가 그려진 비키니를 입고 왕관을 쓴 채 망토를 휘날리며 날아가던 그녀처럼...

집 앞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기다리는 언니를 보고, 당황한 모습으로 서성이던 청년을 한번 째려봐 주면 상황은 종료되었다. 우리는 함께 집으로 걸어가면서 그 남자의  행동을 흉내 내고 키득키득거리고 떠들었다. 그러면서도 난 속으로 ' 그 남자 괜찮던데  아깝네 ' 했다.

 

  언니는 전형적인 청순형 소녀였으므로 어딜 가나 고백을 받았고 주목도 받았다. 춘향이와 향단이 같았던 우리였지만 난 내가  향단이 인 게  싫었다.  표현은 못 했지만...


   그래도 순하고 여린 성격의 언니는 많은 것을 내게 양보해 주었고  급기야 새로 산 옷들도 먼저 입으라고 내어줄 정도였다.   언니를 생각하면  부모님의  사랑을 다 가져가고 좋은 유전자도 다 섭취해 버린 몹쓸 이기주의자 같다가도 언제나 내 동생 내 동생 하며 챙겨주니 없어선 안될 내 반쪽 같기도 하다. 그렇게 마음속에다  질투심과 죄책 감이라는  이름의 샴쌍둥이를 길러주는 존재.

그 쌍둥이는 언제나 함께 등장할 수밖에 없어서 늘 나를 당황시킨다.


  오늘 언니에게 한번  전화를 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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