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는 할 수 있는
어제 사은품으로 받아온 시장바구니에는 택이 달려 있었다. 손잡이에 달린 택을 자르기 위해 부엌 서랍을 열었다. 가위로 택을 자르고 나니 미뤄두었던 잘라야 하는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바지에 삐져나온 실밥을 자르고, 극세사 담요의 실밥을 잘랐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구절을 노트에 썼다. 조카의 세뱃돈을 봉투에 넣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문구를 쓰고, 쓸모를 다한 포스트잇을 손으로 구겼다. 그때까지 가위를 들고 다녔다. 더 자를 게 없나 생각을 하다가 싱크대 위에 가위를 올려놓았다. 동선이 잘렸다.
싱크대 앞 식탁에 어제 구워놓은 크로와상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눈으로만 봐도 수분기가 없어 보였다. 먹어치워야 할까 버려야 할까 잠깐 고민했다.
모든 일을 계획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 목적이 없는 경우에는 일과 일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는 사람도 없다. 갑자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부엌을 서너 번씩 왔다 갔다 하고 거실을 가로지른다. 특정하게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아니면, 무작위로 떠오르는 행동을 비효율적으로 해낸다. 유일하게 계획적으로 움직일 때는 밥을 할 때이다. 밥을 할 때는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이며,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몸이 먼저 기억한다.
냄비를 약한 불에 달구고 들기름과 식용유를 반반 넣는다.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볶아 고추기름을 만들고, 물을 넣는다. 고추기름이 표면 위로 사르르 떠오른다. 해물 순두부찌개를 만들 준비를 한다. 오징어와 새우, 동죽을 씻어놓고 물이 끓어오르면 넣는다. 해물이 익으면 약간의 간이 생기기 때문에 해물이 끓어올랐을 때 간을 한다. 미림 한 숟갈과 멸치액젓을 넣는다. 그리고 순두부를 잘라서 넣는다. 냉장 순두부가 열기에 퍼지게 약하게 뭉근하게 끓인다. 양피와 파를 송송 썰어 넣고 계란을 탁 쳐서 마지막에 넣는다. 해물의 맛과 순두부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진 칼칼하고 시원한 찌개가 완성된다. 감칠맛이 올라온다.
음식에는 순서가 중요하다. 두서없이는 음식의 맛이 살지 않는다. 매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든 한 가지 정도는 순서가 있는 게 필요하다. 음식을 만들 때는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무엇을 만들지에 따라 생각이 알아서 정리된다. 오랜 시간 숙달 되어서 몸이 먼저 반응한다. 엄마의 어깨너머로 오래 보아 웬만한 음식은 마치 만들어 본 것 같다. 지금까지 나를 먹여 살린 음식들이 내 몸을 이루고 있다. 할머니와 엄마와 스스로 만든 음식이 허벅지에 가 있고, 팔뚝에 있고 가슴에 있다.
두서없고 엉망인 머릿속 한편에 있다. 그래서 적어도 한 종류는 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