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뼈처럼 묻혀있던 수도관
수도관이 터져 아랫집이 물바다가 되던 날. 오래된 빌라에 3충에 사는 나는 죄인이 되었다. 아래층의 물을 10 통도 넘게 퍼주고 개별 수도 계량기를 잠그고 지쳐 쓰러져 누워있었다. 7시가 넘어 전화가 왔다. 수도계량기를 잠갔는데도 물이 떨어진다는 연락이었다. 밖에서 보니 3층부터 2층까지 외벽이 젖어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전 세대에 양해를 구하고 저녁 9시경 빌라로 들어가는 전체 계량기를 잠갔다. 그제야 줄줄 흐르던 물이 똑똑 떨어지게 바뀌었다.
다음날, 급하게 구한 설비기사님이 늦은 오후에 화장실 바닥을 깨기 시작했다. 늙고 키가 큰 기사님은 드릴로 바닥을 깨기 시작했다. 깨진 타일조각이 튀어 오르고 시멘트와 방수층이 산산이 부서져 제일 밑바닥에 있던 모래자갈이 드러났다. 호미로 바닥을 파내며 수도관을 찾았다. 아래층으로부터 올라온 동파이프 2개 싱크대로 가는 배관 한 개. 옆으로 옆으로 드릴이 바닥을 뚫고 흰 자루에 모래와 흙더미가 쌓여갔다. 터진 부분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바닥을 파낸 곳으로 물이 고이기는 하는데 어디서 새는지 찾기 어려웠다.
점점 화장실문 쪽으로 바닥을 깨다가 문틀 옆 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보고 다시 바닥을 깨나갔다. 진흙을 긁어내는 손이 바빠지고. 설비기사님은 문경첩 옆을 드릴로 깨기 시작했다.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좀 더 위로, 좀 더 위를 깨자 녹슨 수도관이 모습을 보였다. 붉게 삭은 관에서 물줄기가 쏘아져 올라왔다. 집을 처음 지을 때부터 있었을 것이라는 수도관은 붉고 까맸다. 물줄기가 사방으로 튀어나왔다. 물탱크와 직수로 이어져 있었을 것이라는 공용수도관은 3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설비가사님의 베이지색 바지가 어둡게 변하며 젖었다.
나 여기 있다고, 내 안에 물이 흐르고 있다고.
준공연도가 1988년인 이 빌라의 물탱크는 2000년에 직수관으로 바뀌면서 철거되었다. 23년이 지나 물탱크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수도관이 터진 건 예상밖의 일이었다. 이 집의 주인이 4명쯤 바뀌는 동안 수도관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벽속에 이름 없는 뼈처럼 묻혀 있다가 이제야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마치 발견해 주길 기다렸다는 듯 설음을 토해내는 공용수도관의 연결 부위를 설비기사님이 잘랐다. 이제 영원히 잊혀질 물탱크 수도관은 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