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자기 인생을 책으로 쓰면 열 권도 넘을 거라는 말처럼, 해외살이 10년의 에피소드를 풀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다.
개미와의 전면전 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태국살이의 웃지 못할 황당한 장면들이 줄기에 붙은 고구마처럼 주렁주렁 딸려 나온다. 무엇부터 써야 할지 모를 만큼이다.
그중에서도 생활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가장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던 이야기를 꼽자면 단연 수돗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돗물을 바로 받아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하지만 태국의 수돗물은 사정이 다르다. 요리에 직접 사용하거나 그대로 마시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상하수도 시설이 우리나라처럼 정비되어 있지 않은 곳도 많고, 주택 단지에 따라서는 상수도가 아닌 지하수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상수도가 들어온다고 해도 석회질이 많고 오래된 물탱크와 상수관을 거치며 녹물이나 흙탕물이 섞여 나오는 일이 잦다. 그래서 태국에서는 현지인들조차 먹는 물은 당연히 사서 마시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10년의 세월 동안 태국의 인프라도 조금씩 개선되었지만 내가 처음 왔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다. 태국에서의 처음 생활하게 되된 첫 집의 집주인은 수돗물은 절대 바로 마시면 안 된다며 20리터짜리 큰 통에 담긴 물을 정기적으로 배달시켜 마시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통에 40밧. 하지만 그 통에 담긴 물의 출처조차도 선뜻 믿기 어려웠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교민들이 가정용 정수기를 따로 설치했다. 나 역시도 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의 정수기 업체를 통해 가정용 정수기를 별도로 설치했고 정수된 물은 요리 재료를 씻거나 설거지용으로 쓰고, 마시는 물은 정수기를 거친 물을 받아 보리차를 넣고 끓여 식혀 냉장고에 넣어두고 마셨다. 무더운 나라에서 매일같이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식히는 일이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큰 탈은 없었지만 물을 바꿔 마신 뒤 배탈이나 복통을 겪는 교민들도 적지 않았고, 수돗물로 샤워한 아이들이 피부 트러블을 겪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니 수돗물에 예민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태국의 일반 주택에는 대부분 마당에 물탱크가 있다. 상수도든 지하수든 집까지 끌어온 물은 일단 그 물탱크에 저장한 뒤 가정에서 사용하는 구조다. 문제는 이 물탱크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침전물이 쌓인다는 점이다. 단수가 되었다가 물이 다시 들어오는 순간, 그 침전물이 한꺼번에 일어나 흙탕물로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동네 인근 공사로 상수관을 타고 흙탕물이 유입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갑자기 흙탕물이 쏟아져 나오는 일은 태국살이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 상황을 모르고 세탁기를 돌렸다가 흰 빨래가 누렇게 자연 염색되어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끼던 흰 블라우스가 흙탕물에 물들어 나온 날,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고 결국 물탱크를 통째로 청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개미가 아니라 수돗물과의 전쟁이었다.
물탱크 청소 기술자들을 불렀다. 그런데 태국에서는 기술자를 부르는 단계부터 인내심이 필요하다. 다시 등장하는 짜이옌옌 모드.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약속을 잡아도 이제는 한국에서는 사라진 코리안 타임을 이곳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다. 코리안 타임이 ‘조금 늦음, 즉 지각’이라면, 어메이징 타일랜드 타임은 도대체 언제 올지 '종잡을 수 없음'이라는 점에서 사람의 인내심을 극한까지 시험한다.
그렇게 기술자가 도착해 물탱크 청소를 시작했다. 그 장면 자체가 또 하나의 문화 충격이었다. 모터를 단 작은 트럭에 장비를 싣고 온 작업자들은 먼저 물탱크의 물을 어느 정도 빼낸 뒤, 강한 수압으로 탱크 안쪽에 쌓인 침전물을 떨궈냈다. 물을 빼내는 호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시커먼 물은, 임산부나 심신이 미약한 사람은 시청을 삼가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비주얼이었다.
그래도 남아 있는 침전물은 큰 솔로 직접 문질러 제거했다. 작업자들이 물탱크 안으로 들어가 손으로 닦아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순간, 우리나라 수돗물 아리수가 유난히도 그리워졌고, 잘 정비된 시스템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절실해졌다.
물탱크 청소가 끝나면 비워진 탱크에 다시 물을 채운다. 물차 트럭이 와서 물을 붓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물은 또 어디서 온 물일까…’
하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일단 물이 맑으니까. 어차피 먹는 물은 생수로 해결하면 되니까.
청소가 끝난 뒤 집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더, 다행히도 집 내부 수도로 연결되는 부분에 정수 필터를 추가로 설치해 주었다. 물론 필터 설치 기사와의 약속을 잡고 작업을 마무리하기까지의 과정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 이야기는 더 적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힘겨웠다고만 해두자.
며칠에 걸친 물탱크 청소와 필터 설치가 끝났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일이 ‘완벽하게’ 끝나서가 아니라, 어쨌든 ‘끝나긴 했기’ 때문이다.
태국살이란 그런 것이다. 처리된 것 자체에 감사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
관광 1번지,
미소가 아름다운 나라,
‘천국 위의 태국’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전이 되고 단수가 되고 수돗물에서 흙탕물이 나오며, 도로 공사가 아무 안전장치 없이 진행되는 나라.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또 다른 방식으로 어메이징 타일랜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 어메이징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물을 틀기 전에는 잠시 숨을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