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의 이어진 기록
교실에 들어서니 내 책상 위에 커다란 보퉁이 하나가 놓여 있다.
살짝 들여다보니 여러 벌의 옷이 들어있다. 어제 내가 현희 어머니께 간곡히 얘길 했더니 당장에 보내온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새학기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담임도 모르는 사이에 학급별로 자모회가 만들어진다.
이미 알고 있는 자모들끼리 대충 활동적인 한 사람을 중심으로 비공식적으로 만들어진 자발적 모임이다. 담임에게는 꽤 여러가지로 도움을 준다.
특히 소풍을 가거나 학교 행사가 있을 땐 담임교사의 점심까지도 다 챙겨주고 미처 손길이 닿지 못한 부분들을 마음 써 주니 참 고맙긴 하다.
우리 반에 현희 어머니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내가 몇몇의 아이들에게 헌 옷을 좀 구해 줄 수 있느냐고 제안했을 때도 현희 어머니는 오히려 앞장서서 호응해 주었다. 마침 현희 아빠가 교회의 목사님이라 바자회 같은 기회가 있었다며 곧 바로 보내온 것이다. 새 옷은 아니라지만 꽤 괜찮은 옷들이다. 깨끗한 신발도 들어 있다.
보퉁이를 발견한 순간 제일 먼저 순복이의 너절하고 때 묻은 옷에 내 시선이 재빨리 닿았다.
나는 아이들을 다 보낸 후 이 순복이에게 몇 가지를 입혀보고 나누어 주었다. 순복이 얼굴을 보니 퍽 좋아하는 눈치다. 부끄러워하거나 더구나 불쾌한 기색은 없어서 마음이 한결 놓이고 기쁘다.
내일은 순자에게도 나누어 주고 신발은 진승기에게 줘야겠다. 살짝 그 녀석의 발을 가늠해 보니 맞을 것 같다.
근래엔 순자의 표정도 눈에 띄게 밝아진 것 같다.
아이들이 앉아 있는 의자 사이로 계간을 지나다 보면 유난히 쩐 냄새 때문에 눈살이 찌푸러지곤 했는데.
언젠가 저 순복이의 끈적거리는 머리칼을 좀 말끔히 감겨 주었으면 좋으련만.
며칠 후,
오늘은 순자가 3개월분의 육성회비를 가지고 왔다. 군복 입은 순자 오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돈을 감격스럽게 받았다. 돌 광산에서 노동을 하여 받은 품삯에서 냈다고 한다.
가슴이 얼얼하도록 고마울 뿐이다.
한 시간이 끝났을 때였다.
이번에는 순복이가 내 책상 앞으로 오더니 무언가 뒤로 감추면서 자꾸만 몸을 비비 꼬았다. 얼굴을 보니 상기된 표정이다. 게다가 히죽이 웃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상당한 즐거움이 있나 보았다.
“왜 그러니?”
내가 묻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현희가
“순복이가 선생님 주려고 땅콩 가져왔대요.”
일러바치듯 냉큼 말했다.
“땅콩? 웬 땅콩?” 그제야 순복이는 뒤로 감추었던 주머니를 얼른 내 책상 위에 놓았다. 신발주머니다. 눅눅해진 땅콩이 껍질 채 잔뜩 들어있다.
“이걸 이렇게 누가 보냈니?”
내가 반쯤 놀라며 당황해 묻자 다시 현희가 자기 자리에 앉은 채 대답했다.
“순복이가 집에 있는 거 몰래 가져왔대요.”
“저런. 순복아, 정말이야?”
나는 놀랍고 황당해서 눈을 크게 뜨고 순복이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순간 판단이 서질 않았다.
지난 번 일로 자기 딴엔 나에게 뭔가 보답하고 싶어서 그것들을 소중히 싸들고 온 모양인데, 그 마음은 나도 충분히 고마운데 집에서 몰래 가져왔다니 이걸 어쩌지?
“순복아, 고마워.”
일단은 그렇게만 반응했다. 고맙다고 말하는 나를 보고 순복이도 환하게 웃었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본 것 같다. 아이는 아주 행복한 얼굴로 해맑게 웃었는데 순간 나는 마음에 줄줄 소리 내듯 흐르는 아픔에 젖고 있었다.
“그런데 순복아, 아니, 우리 다음에 더 얘기하자.”
가엾은 것, 저 어린 나이에 아이스케이크나 사 달라고 졸라야 하는 나이에 점심을 못 먹도록 가난의 아픔을 절절히 새기며 오그라들어서 크지도 못한 애.
사실 나는 주부 역할이나 살림살이에는 영 맹추다. 이렇게 껍질째 눅눅한 생땅콩은 사 본 적이 없다. 통째로 물에 삶아서 까먹는 건지 미리 까서 볶아먹는지도 잘 모른다.
그래도 순복이가 좋아하니 나 또한 흐믓하다. 오늘은 정말 큰 선물을 받은 날이다.
그런데 몰래 가져왔다는 현희 말이 가슴에 콕 박힌다.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