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추억할 수 있는 조부모님은 외할아버지뿐이다. 젊은 시절 억척스럽게 땅을 일구어 가계를 일으켜 세운 할아버지. 누군가 강하고 굳건한 우리 엄마를 울린다면, 아마도 할아버지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엄마와 이모들은 할아버지 앞에서 큰 소리도 잘 내지 못했고 할아버지의 안방에는 늘 삼촌이나 이모부 같은 남자들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을 진두지휘하며 농사일을 맡길 땐 또 어찌나 카리스마가 넘치셨는지. 어린 나도 외갓집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할아버지라는 걸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좁은 마루에 쪼그려 있던 나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엉덩이를 옮겨 앉았다. 아빠보다 어깨가 넓고 키도 크신 할아버지의 풍채에 압도당한 까닭일까. <거인의 정원> 속 아이처럼 혹여 할아버지가 나를 쫓아내진 않을까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
할아버지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 시작한 건 내 기억이 선명해질 무렵부터이다. 외갓집에 도착하면 안방에 들어가 절을 올리고 형식적인 안부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는지. 무릎 꿇고 연설을 듣는 건 지루한 일이었지만,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용돈이었다. 할아버지가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 여러 장을 꺼내 손주들에게 나누어주시면 그제야 우리는 가뿐해진 마음으로 방을 나올 수 있었다.
사촌 오빠들과 남동생들 사이에서 홀로 여자였던 내게, 지폐 한 장을 더 꺼내 쥐어주셨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할아버지가 “하나뿐인 우리 손녀, 나중에 미스코리아 나가도 되겠네.” 하시면, 옆에 있던 오빠들이 “미스코리아는 무슨, 미스 고릴라지요!” 하며 큭큭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 할아버지가 나 미스코리아 나가래.”라고 엄마에게 전했을 때, “그런 말씀을 하셔?” 하며 놀라워하던 엄마의 표정도 잊을 수 없다. 엄마의 얼굴에서 ‘아버지가 그런 얘기하실 분이 아닌데’라는 속마음을 읽어낸 나는 짐짓 뿌듯했더랬다. 할아버지가 나를 좋아하시는구나, 나를 예뻐하시는구나, 안도하는 마음이었다.
그때부터 내 안에 조각처럼 남아 있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런 것들이다. 막걸리를 즐겨드시던 할아버지를 위해 아빠가 약주 두어 병을 사다 드리면, 쳐져 있던 눈썹이 올라가면서 밝게 환해지던 얼굴, ‘할아버지!’ 부르며 안방에 뛰어 들어가면 내 쪽으로 선풍기를 돌려주시던 손길, 머리를 누가 이렇게 곱게 따주었냐며 들여다보시던 눈길, 꿀 바른 과자 봉지를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 밀어 넣으며 배웅해 주시던 발길.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그게 전부이다. 어른들께 살갑지 못했던 나는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는 일이 줄어들었고, 대화라기보다는 형식적인 인사가 전부인 사이가 되어버렸다.
요즘 같은 늦가을, 회오리치는 노란 잎들을 보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대학생 때 요양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어느 주말이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어르신들과 처음 만나던 날,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 표정으로 차가운 복도 끝에 굳어 서 있던 내 모습이 그려진다. 같이 온 친구가 능숙하게 할머니의 말동무를 자처하며 다리를 주물러드리는 동안, 나는 미숙한 손놀림으로 실수를 연발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도 쇠약한 어르신들의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아기가 바스러질까 봐 겁나서 안지 못하는 초보 엄마처럼. 할머니 입에 죽을 떠드리다가 기침이라도 한 번 하시면, 건더기가 목에 걸린 건 아닐까 놀란 마음에 수저를 떨어뜨렸다. 음식물이 묻은 웃옷을 갈아입히는 데는 또 왜 그리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병원복 아래 감춰진 거친 피부와 가느다란 팔, 튀어나온 혈관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징 하고 진동이 울려왔다. 그런 마음을 들키는 게 실례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자꾸 다급해지던 손 때문에 더 실수가 잦았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우리 애 웨딩드레스도 손수 바느질해 만들어줬어.” 한 할머니가 젊은 시절의 손재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건너편 침대의 어르신도 이에 질세라 목소리를 세웠다. 건설 현장에서 식당을 하며 아들 셋 대학 교육까지 다 뒷바라지했다고.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는데도 그때는 피곤한 줄 몰랐다고. 그런 무용담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젊은 시절 그분들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또다시 마음이 일렁였다. 이 병원에 있는 누구 한 명 세월을 건너뛴 사람은 없을 테니, 최선을 다해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온 그 시간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런 사실을 거듭 깨달을수록 어쩐지 어르신들이 약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가녀린 육체에 가려진, 어린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견고한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병원을 나서는 저녁이면 단편 영화를 보고 나온 것처럼 묘한 여운에 휩싸였다. 하루 끝에 걸린 붉은 석양과 마침내 찾아온 어둠. 어르신들이 펼친 서사를 듣고 난 후여서일까. 변화하는 하늘빛을 감상하며 그 하늘이 마치 인생의 은유 같다고, 홀로 생각했다.
여든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가 요양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던 날도 찬 기운이 서린 가을밤이었다. 세월은 모두에게 공평히 흐르는데, 왜 나를 둘러싼 상황과 사람들은 늘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며 살았는지. 마을 입구의 장승처럼 늘 곧고 우람한 모습이셨던 할아버지도 나이 듦을 어쩌지 못했고, 그렇게 그 겨울의 길목에서 나는 할아버지와 기약 없는 이별을 맞이해야 했다. 모두들 호상이라 했고 나는 울지 않았다. 슬픔에 애달파질 만큼 할아버지와 유별난 정을 나눈 것이 아니어서일까. 다만 쓸쓸했다. 오래 전, 봉사활동을 마치고 병원 밖을 나서며 마주했던 감파란 빛 하늘처럼. 그건 관계에서의 상실감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애틋함에 가까웠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의 저편에서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삶, 결코 헛되지 않은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거룩함. 그때의 감정을 어떤 언어로 설명해야 할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길에서 자주 할아버지를 만난다. 지하철역 계단 앞에서 나물을 파는 뒷모습과 어린 손자의 유치원 가방을 걸쳐 멘 어깨, 공원 벤치에 하염없이 앉아있는 굽은 등을 보면서 우리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러면 다시, 시리게 까맣던 어느 밤처럼 마음이 고요해져 온다. 그러다, 무력하게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종로3가역으로 출퇴근하던 어느 날, 탑골 공원 안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어르신들을 힐끗 거리며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 누군가 비웃듯 속삭이던 말이 떠올라서. 새로운 전자 기계 앞에서 느려지고 서툴러지는 노인을 귀찮아하는 표정들이 생각나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얼굴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실에 서글퍼지고 만다.
요즘 내가 자주 하는 일은 길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의 지난 시간을 아주 잠깐씩 상상하는 것이다. ‘저분은 농사의 신이 아니었을까’, ‘저분은 목소리를 들으니 노래 좀 하셨을 것 같은데.’ 멋대로 하는 생각이지만 그렇게 관심을 가질수록 친근함에 마음의 빗장을 살짝 풀게 된다. 힘없고 말투가 어눌해도, 어디 그 모습만이 그분들의 전부일까. 상상의 물음표를 그려나가다 보면 궁금해져서 묻고 싶을 때도 있다. "나 젊었을 때는” 하고 운을 떼며 하는 이야기들을 모두 귀담아듣고 싶은 생각에 “정말요? 대단하세요." 기꺼운 마음으로 맞장구칠 준비를 마친다.
언젠가 티브이에 나온 박중훈 배우가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라며 언급한 문장이 있다. “어린아이 너무 나무라지 마라. 내가 걸어왔던 길이다. 노인 너무 무시하지 마라. 내가 갈 길이다.” 나는 이 말을 따라 읊으며 겸허함을 배운다. 오늘의 젊음이 나만의 특권이 아님을 새삼 되새긴다.
최근에 외할아버지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할아버지의 키가 외삼촌들보다 작았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에겐 180센티미터 가까이 되는 삼촌들보다 할아버지가 더 크게 느껴졌더랬다. “그런 게 존재감이지.” 의아해하는 내게 엄마가 건넨 말이다. 태산처럼 거대했던 그분께서 내 손에 쥐어주시던 꼬깃한 지폐와 꿀과자를 추억하며 저물어가는 가을길을 걷는다. 마주하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로 인사하며 누군가에게 단단하고 너른 언덕일 그 뒷모습들을 따스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