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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choice Jul 10. 2023

비 오는 날 속초시장에 가면

감자전 할머니와 막걸리

침대에 누워 엄마인 영이 씨에게서 온 카톡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오전 8시 30분.

<엄마 반건조 오징어 하나만 사다 줄 수 있을까?>

오전 9시 16분.

<아니다 비 온다는데 시장 가지마>


그래서 반건조 오징어를 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엄마들은 나이가 들면 꼭 이런 요상한 화법을 쓴다. 그래도 큰딸 인생 25년차의 지혜를 발휘해서 영이 씨의 말을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엄마가 반건조 오징어가 먹고 싶긴 한데, 너 귀찮을텐데 부탁해서 미안하네. 혹시나.... 그래도 사다 주면 고맙겠어'


그렇게 해서 오늘의 목적지는 속초관광시장이 되었다. 평일인데도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넘쳐났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하얀색 닭강정 박스와 술빵 비닐봉지를 양손 가득히 든 속초시장 순례자들이다. 나는 인파 속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영이 씨가 주문한 반건조 오징어를 찾았다. 이건 몇 마리에 얼마예요? 이건 사이즈가 어떻게 되나요?


어릴 때는 몰랐는데 커가면서 부모의 마음을 더 이해하게 된다. 영이 씨도 이렇게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테다. 점점 나이들어가는 부모를 보며 나 역시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것, 더 아름다운 풍경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크다.


고심 끝에 좋은 건어물, 쿨하게 할인!을 외치는 쿨가이 사장님을 만나 반건조 오징어를 구매했다. 영이 씨가 좋아하는 쥐포도 두툼한 것으로 골라 함께 넣었다. 사장님이 아이스박스 택배를 부칠 본가 주소를 적으라며 구깃구깃한 종이 공책을 꺼내 건네주셨다. 거기에 집주소와 영이 씨의 연락처를 꼼꼼히 적어 돌려드렸다. 어머니가 드실 거라서 잘 부탁드린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영이 씨가 준 미션을 완수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뒤돌아선 순간,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후두둑 쏟아졌다. 분명 일기예보에는 늦은 오후에나 비가 온다고 했는데. 집에 일찍 돌아갈 요량으로 우산도 챙기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속초시장을 좀 돌아보기로 했다. 꿀호떡이나 벌집 아이스크림, 만석닭강정 앞에 사람들이 죽 늘어서 있었지만 그런 양산형 먹거리는 도저히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골목 끝에서 눈길을 확 끄는 문구를 발견했다.


<셀프 막걸리 1잔 1,000원>


이거다. 셀프 막걸리. 비 오는 날은 감자전에 막걸리지.


속초시장 셀프 막걸리 1잔 1,000원

점포의 주인은 굵은 목소리와, 팔뚝과, 몸집을 가진 여장부 같은 할머니였다. 할머니 앞에는 감자전을 굽는 철판이 있고, 그 주변으로 긴 철판 탁상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비어 있는 두 자리에 앉자마자 만석이 되었다. 우리처럼 비 오는 속초시장의 정겨운 분위기에 홀려 감자전에 막걸리가 생각난 사람들이 많은 듯 했다.


"저희 감자전 하나에 막걸리 마실게요."


"막걸리는 왼쪽에서 퍼다 드쇼."


이 점포에서 막걸리는 셀프. 탁상 왼쪽 구석에 놓여진 막걸리 항아리에서 자기가 원하는 만큼 퍼다 마시면 된다. 양과 상관없이 한 잔에 무조건 천원! 내가 막 국자를 들고 막걸리를 뜨려고 할 때였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께서 줘봐, 하고서 내 잔을 가져가시더니 넘치기 직전까지 막걸리를 담아주셨다.


"자 봐봐, 이게 끝까지 최대한 많이 담아야한다고. 많이 먹고 즐겨야지, 아깝게."


흘리지 않고 들고 가기 힘든 양이었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안전하게 가져갈 수 있었다. 아, 여기 룰은 이런 거구나. 잔 끝까지 담아 많이 먹고 즐기기.


쫄깃쫄깃 감자전

곧이어 우리의 감자전이 완성되었다. 감자전은 따로 접시에 내주시지 않고, 각자 자리 앞으로 슥슥 밀어 놓아 주신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 앞에 놓인 감자전을 철판 위에서 조금씩 떼어 먹는다. 이렇게 하는 데는 감자전에 대한 주인 할머니의 철학이 있었다.


"난 포장도 안 해. 이건 따뜻할 때 바로 먹어야지 맛있어. 포장하면 맛이 없어져. 기다려서 먹던지 해야돼."


그런 할머니의 철학 아래, 손님들은 옹기종기 철판 앞에 둘러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감자전을 먹었다. 왼쪽엔 중년의 50대 부부, 중간엔 나와 온이, 오른쪽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젊은 30대 초반의 부부, 오른쪽 끝엔 네 살배기 아이를 옆에 앉히고 막걸리를 즐기는 젊은 엄마. 각자 치열하게 삶의 이야기를 그려나가다가, 감자전과 막걸리 한 잔에 잠깐의 쉼을 찾은 사람들이었다.


곧 정적을 깨고 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얌전히 앉아있는 것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때 아이를 바라보던 주인 할머니가 구석에서 버터구이 오징어를 꺼내 뜯으셨다.


"야 이눔아, 자 이거 오징어 떼 줄 테니 먹어라. 이거 아무나 안 주는 맛있는 건데.... 할미가 네가 예쁘니까 주는거야. 할미는 여기 놀러와서 핸드폰 보고 앉아있으면 다 치우라고 그래. 놀러왔으면 엄마 손 잡고 예쁜 것 보고, 맛있는 거 먹고, 놀고 쉬어야 되는거여. 너도 이것 먹고 그만 울고."



놀러왔으면 핸드폰 같은 것 보지 말고, 예쁜 거 보고 맛있는 거 먹고 쉬면 그만이라는 할머니의 말이 자꾸 와닿았다.


여행과 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떠났지만, 정작 그 곳의 아름다움을 깊이 즐기거나 진정한 의미의 쉼을 경험한 일은 얼마나 되나.... 할 일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조급해진 마음이 순간을 즐길 수 없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빗소리를 듣다가....


아, 모르겠다.

"저희 감자전 하나 더 주세요."


일단 오늘 내 하루는 감자전과 막걸리로 채운다. 잡다한 생각은 뒤로 미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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