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어떤 풍경은 삶의 모습이 된다
강원도에서의 여섯째 날 아침, 온 몸땡이를 두들겨 맞은 듯한 아픔에 눈을 떴다. 3일 연속 서핑의 후폭풍으로 근육통이 몰려온 것이다. 바닷속에서 팔 휘젓기, 보드 위에서 일어서기 밖에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전신의 근육이 아픈지. 이제서야 서핑이 에너지를 많이 요하는 운동이었음을 깨닫는다.
눈은 떴지만 일어나기가 싫어 침대에서 최대한 밍기적거렸다. 팔도 아프고, 등도 아팠다. 이런 핑계를 대서 하루종일 죽은 듯이 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언젠가 꼭 한 번 일해보고 싶은 회사였다. 회사의 규모는 작았지만 줄곧 롤모델이었던 분이 거기에 계셨다. 우리 분야에서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것들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분이었다. 배울 점이 많았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성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해주셨을 때에는 마치 최애 연예인 팬 싸인회에 온 것처럼 마음이 쿵쾅거렸다.
그래서였을까, 우울 속에서 헤매며 건강한 정신으로 하루를 버티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음에도 일을 못 하겠다는 말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계약서 작성 전에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무거운 마음으로 노트북을 켜고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글을 썼다. 나이를 먹을수록 '예,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보다 못하겠다는 말이 더 어렵다. 못 할 것 같지만 해내야 하는 일이 많아지는 게 어른의 삶인 듯하다. 하지만 때로는 건강이나 행복처럼 삶의 더 중요한 가치들을 위해 무언가를 과감히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내 생각과 입장일 뿐일 수도 있다.
가까스로 '전송' 버튼을 누른 뒤 황급히 채팅창을 나왔다. 갑자기 1이 없어지면 어떡하나, 부정적인 답변을 하시진 않을까 하는 걱정들로 머릿속이 채워졌다. 오전을 통째로 고민했는데 막상 적고 나니 몇 줄 되지도 않는다. 답장이 올까 두려워진 나는 재빨리 방해금지 모드를 켜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 땅끝까지 도망가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도 날 찾지 않은 채 한 달이 지나가버렸으면....
그랬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온이가 말했다.
"지금이라도 땅 끝까지 한 번 가봐?"
그렇게 대한민국 땅 끝까지 가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일단 목적지는 고성 통일전망대였다. 내친 김에 지도상 표시되어 있는 도로의 끝인 제진역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먼저 통일전망대에서 출입신고를 해야 거기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며 수많은 풍경들을 만났다. 그 중 특히 아름다운 것들은 내려서 카메라에 담아보기도 했다.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리에는 일출 명소인 수뭇개바위가 있다. 바다에서 해가 뜨면 그게 다 일출 명소지, 하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일출 시간에 저 수뭇개바위를 바라보고 있으면 구멍을 뚫어놓은 것 같은 바위 정 중앙 부분으로 해가 떠오른다고 한다. 안내문에 첨부된 사진을 보니 마치 바위 그릇에 해가 담기는 것 같은 장관이었다. 언젠가는 그 풍경을 꼭 직접 보고 싶어졌다.
우리는 가진과 거진을 지나 화진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화진포에는 이승만 별장과 김일성 별장이 위치해 있다고 해서 함께 둘러보기로 했다. 아름다운 곳이 수없이 많은 강원도인데, 굳이 화진포에 별장을 지은 이유는 무얼까.
김일성 별장은 화진포 바닷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다. 둥글고 납작한 돌들을 쌓아 만든 석조 건물이었다. 원래는 외국인 선교사인 셔우드 홀이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으나, 1948년부터 2년간은 김일성 가족의 하계 별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모습이 마치 잘 지어진 유럽의 성과 닮아 있었다. 벽돌을 일정하게 깎아 지은 것도 아니고, 제 자리에 들어갈 돌들을 어디서 찾아서 이렇게 아름답게 쌓아 올렸을까? 오래 전 이 건물을 손수 지었을 장면을 상상해보니 경이로웠다.
김일성 별장 옥상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풍경이다. 앞으로는 화진포 바닷가가, 뒤로는 오래된 나무가 우거진 숲이 별장을 감싸고 있다.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여기에 별장을 지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통일전망대에 도착하기 전 우리는 마지막으로 대진항에 들렀다. 온이는 대진항에 색색의 납작한 방파제가 있는데, 이것이 무척 예쁘니 보고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방파제만 한 무더기 쌓여 있을 뿐인데, 다채로운 색상이 들어가니 그 자체로 멋진 풍경이 되고 있었다.
우리는 바다 위에 놓인 길을 따라 주변을 걸었다. 온이는 호기심이 많은 나를 위해 대진항 이곳저곳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곳곳에서 '대무너즈'라고 불리는 귀여운 문어 캐릭터 조각상을 마주쳤다. 나는 온이에게 다른 물고기도 많은데 왜 굳이 문어로 대표 캐릭터를 정했느냐고 물었다. 온이는 대진항에서 특히 문어가 많이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대진항의 많은 주민들이 문어를 잡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대진항에는 배를 수리하는 곳도 있는데, 길을 돌아 나오며 보였던 큰 흰색 창고같은 곳이 바로 선박 수리소라고 했다.
혼자 여행했다면 몰랐을 일들이다. 온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강원도의 풍경은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삶의 모습이 된다. 눈에 담긴 풍경 속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느샌가 나도 그 안에 있었다. 아마도 그게 내가 강원도를 더 사랑하게 되는 이유인 것 같기도 했다.
겨우 도착한 통일전망대는 굳게 닫혀 있었다. 우리처럼 어안이 벙벙해진 방문객들이 문 앞에 여럿 서 있었다. 보수 공사 중이어서 당분간 문을 열지 않는단다. 왠지 허망하고 웃겼다. 큰 마음 먹고 땅끝까지 도망쳤더니, 결국 여기서 끝이 났다.
우리는 뜨거운 햇살을 뚫고 속초로 돌아왔다.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노을이 지며 어둑어둑해졌다. 근처 마트에 들러 맥주를 몇 병 산 후, 차에서 캠핑의자를 꺼내 속초해변으로 향했다. 사람 구경 바다 구경을 하며 맥주를 마시니 금세 나른해졌다. 몇 시간 전에 땅 끝까지 다녀올 뻔(?) 한 게 잘 실감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회사에서 상황을 이해한다, 괜찮다는 연락을 받았다. 죄송한 마음과 안도하는 마음이 함께 들었다. 그래도 강원도에서 지내는 동안 중요한 일들이 하나씩 해결되고 있었다. 이렇게 천천히 해 나가면 어떻게든 또 살아지지 않을까. 잘 지나가 준 오늘 하루가 감사했다.
"인생을 결정하는 건 자기 인생을 대하는 태도다. 행복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이 무엇인지, 자기 삶의 어느 부분에서 욕심과 집착을 덜어내야 할지 아는 것." - 『어느 날, 마음이 불행하다고 말했다』 by 손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