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실체를 마주보다
살면서 가장 두려운 시간은 언제였을까?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두려움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성정으로 태어났다. 엄마인 영이 씨조차 내가 뭔가를 두려워하는 걸 본 기억이 많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겁 없는 나 때문에 본인의 가슴이 철렁했던 일화는 있었다.
내가 세 살 무렵 영이 씨는 나를 세발자전거에 태우고 다녔다. 넘치는 에너지를 갖고 늘 밖에 나가 걷고 싶어하는 아이를 안전하게 데리고 다니려면, 뒤에 손잡이가 달린 세발자전거가 최선의 선택이었댔다. 하루는 그렇게 산책을 하고 있는데 아파트 공터에 또래 엄마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익숙한 얼굴들도 많이 보였다. 영이 씨는 나를 데려가 친구들과 놀게 하고 오랜만에 동료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 도중 확인해보니 갑자기 내가 사라진 것이다.
영이 씨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가 어딜 간 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영이 씨는 문득 250m 정도 떨어진 단지내 유치원 놀이터로 향했다. 집 베란다에 서서 늘 그 놀이터를 바라보고 있던 내 모습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전거를 끌고 와 혼자 놀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지금도 영이 씨는 살면서 가장 두려웠던 순간으로 나를 잃어버릴 뻔 했던 그날을 꼽는다.
두려움이란 이토록 특별한 감정이다. 두려움을 마주 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마음 속에 어떤 상처나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때 영이 씨에게는 첫 아이가 삶의 가장 큰 행복이자 약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이 씨가 사랑하는 그 겁 없는 아이는 강원도에 있는 동안 자주 두려움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사실 자주 두려웠다. 그토록 좋아하는 바다 위에 올라 앉아 있는 시간에도 무언가를 두려워했다. 나는 내가 가진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 보고 싶었다. 바다에는 사람이 무서워 할 것들이 많이 있었다. 집채만한 파도, 크게 다칠 수도 있다는 걱정, 파도에 말려 바닷물을 먹게 되는 것. 나는 바다 위에서 무섭다고 느껴지는 순간마다 그 마음의 크기를 재고 감정의 뿌리를 찾았다.
처음에는 큰 파도가 무섭다고 생각했다. 내 키의 두 배쯤 되는 파도가 몰려오면 '이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안전하게 넘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입은 무섭다고 말했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파도를 넘었다. 그러다 파도에 말리더라도 물을 먹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가짜 무서움이었다.
그렇게 여러 순간을 테스트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해가 저물었다. 함께 서핑을 하던 사람들이 저녁을 먹으러 빠져나갔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바다에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고 뒤에서는 좋은 파도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가장 두려웠다. 이제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한다. 그 파도를 탈지 말지, 어떻게 타야 할지도 내 손에 달렸다. 파도에 말려 다치더라도 구해 줄 사람은 나뿐이다. 모든 변수를 계산에 넣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 두려움의 정체를 마주보고서야 알았다. 지금까지 혼자 잘 해왔으면서도 홀로서기가 두려웠던 거구나. 스스로의 선택이 맞는지 자꾸 의심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보드를 돌리고 패들을 시작했다. 파도를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스스로 어떤 행동을 선택했다는 거였다.
결국 그 파도를 잡지 못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두려움을 마주보는 것부터가 새로운 성장의 시작이다. 내일부터는 그것에 맞서는 연습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강원도에서의 다섯째 밤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