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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choice Jun 29. 2023

삶은 망가졌지만 어떤 꿈은 이루어졌다

의도치 않은 행운

언젠가 나는 새 리쉬의 가격이 얼마냐고 이투에게 물었다. 내 서핑 스승 이투는 당분간 개인 리쉬는 굳이 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초보자는 어차피 렌탈 보드를 쓰는데, 서핑샵에서 보드와 리쉬를 함께 대여해주기 때문에 이중으로 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기를 돌렸다. 개인 보드를 사려면 중고로 알아보더라도 최소 30만원에서 50만원. 개인 리쉬는 가장 싼 게 약 7만원. 만약 보드를 산다고 해도 차가 없어서 가지고 다니지 못하므로 강원도에 보관해야 하는데…. 서핑샵 보드 보관료가 1년에 약 40만원에서 65만원. 즉, 개인 서핑 장비를 마련하는 데 드는 돈이 도합 100만원 이상!


계산을 끝내자 이투는 거봐, 못 사겠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이 제대로 나지 않는 대학원생에게 한 번에 100만원 이상을 취미에 지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서핑을 좋아하는데 내 보드도 하나 없다니!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버는 돈은 족족 생활비로 써야 했기에 개인 서핑 장비를 마련하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릴 듯 했다. 그날 밤 나는 서핑 버킷리스트 맨 마지막 줄에 한 가지 항목을 추가했다. 개인 서핑 보드와 개인 리쉬 사기.


원하던 보드를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 후였다. 그 때 나는 친구 조이의 집에서 며칠을 숙식하며 지내고 있었다. 조이는 가끔씩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자신의 집을 쉼터로 운영해왔다. 어떤 행복한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싶거나, 몸과 마음이 지쳐 소진된 친구들에게 회복할 시간과 공간을 주고 싶을 때 그렇게 했다. 이번에 내가 조이의 집에 찾아온 이유는 후자였다. 일주일 내내 전화를 받을 때마다 울고 있던 나에게 조이는 말했다. 그렇게 힘들면 우리 집에 와. 나는 보슬비가 겨우 막아지는 우산을 쓰고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조이네 집으로 갔다.


조이의 집에서 나는 울고 싶으면 울고 나자빠져 있고 싶으면 나자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울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무언가를 해냈다. 일을 하다가 정신이 지칠 때쯤에는 서핑 동호회 카페를 들여다봤다. 거기에 올라온 바다 사진이나 서핑 이야기를 읽으며 쉬는 시간을 보냈다. 여느 때처럼 스크롤을 내려 보고 있었는데, 사고 싶었던 서핑보드의 중고 매물을 발견했다. 단돈 6만원! 당장 사고 싶다는 충동에 마음이 쿵쾅거렸다. 그럼에도 ‘판매자에게 채팅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를 망설였다. 당분간은 서핑을 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강원도에 살고 있는 친구 온에게 연락해 상황을 설명했다. 온이는 글을 올린 판매자가 알고 보니 자신의 지인이었다며 5만원에 보드를 살 수 있다고 했다. 만약 사고 싶다면 자신이 구매한 후 얼마간 보관해 줄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사고 싶다고 말하고 곧바로 사례비를 포함한 6만원을 온에게 송금했다. 전화를 끊자 안방 문을 열어놓고 일을 하고 있던 조이가 물었다.


보드 진짜로 샀어?


응. 이제 나도 내 개인 보드 생겼다!


조이는  방금 전까지 죽을 것처럼 울던 사람이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갑자기 서핑보드를 사는 게 웃기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나도 그런 내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토록 염원했던 내 개인 보드가 생겼다는 거였다. 심지어 단돈 5만원에. 그 보드는 지금 나와 함께 강원도에 있다.


강원도에서의 다섯째 날, 나는 자기 전에 서랍에서 새로 산 리쉬를 꺼냈다. 매끈하게 마감이 잘 된 하얀색 리쉬였다. 흠집이 난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본 후 조심스레 포장을 뜯었다. 리쉬는 바다에서 내 발목과 서핑보드를 연결하는 생명줄이었기에, 큰 파도에 수없이 말려도 멀쩡할 만큼 튼튼해야 했다. 믿음직한 품질과 흔하지 않은 색상을 고르느라 지난 며칠 밤을 고심했다. 방 한 구석에 세워둔 보드 앞에 쪼그려 앉아 보드 밑부분 고리에 리쉬를 단단히 묶었다. 서핑을 할 때마다 반복하던 작업이었지만 어쩐지 이제서야 뭔가 완성된 것처럼 느껴졌다.


삶은 망가졌지만 어떤 꿈은 이루어졌다. 그것도 의도치 않게. 바로 그 지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어쩔 때는 그래, 인생이 망하더라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거지 싶다가도,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닌데 서핑에 올해 운을 다 써버린 것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절망 속에 늘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너무나 두려운 날들 속에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내일 나는 내 보드와 개인 리쉬를 가지고 바다에 나가 파도를 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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