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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Oct 13. 2023

감사합니다

리치디보스 긍정의 말 여섯 번째



기독교 집안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나에겐 몇몇 종교적인 클리셰가 있다. 그중 하나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문장이다. 사실 감사하라는 가르침은 종교를 떠나 인생의 지혜로써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서 바로 우리 인생에서 자주 등장하는 근시안적 오류가 발생한다. 자주 들어서, 반복해서 들어서, 어디서나 들어서 그 말의 깊이를 미처 가늠해볼 기회를 상실한 경우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근시안) 미처 그 지혜를 곱씹어보지 못한 것이다.



최근 읽은 <더 바이브>라는 책은 나에게 '허용'이라는 개념을 다시 알려주었다. 이미 주어진 것들을 바라보는 대신 가지지 못한 것들에게 시야를 뺏길 때, 그러니까 허용 대신 미허용을 채택할 때 우리의 삶에서 감사가 사라진다. 이미 가진 것들을 향한 관점의 전환, 이미 존재 자체로 삶에 완연하게 드러나 있는 완전함을 허용하는 것에서 감사가 출발한다.



사실 '감사하라'는 말에는 소유를 넘은 가르침이 있다. 소유에 대한 감사가 '나'라는 개인에서 출발한 깨달음이라면, 나를 넘어 타인을 향한 연결된 감사도 있다. 이 연결된 감사는 다른 사람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표현될 수 있다.



나는 "감사합니다"를 자주 쓰는데 사실 진짜 감사를 표현할 때 보단 대화를 마무리할 때 많이 쓴다. 바로 회사에서 말이다. 우스갯 소리로 부하 직원은 업무를 받아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웃픈 상황이지만 씁쓸하다. 어쩌면 이런 상황들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의 가치를 더욱 희석하는 것을 아닐까. 업무 중에 사용하는 감사는 팔할이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것 같은 기계적 언어이지만, 시선을 조금만 거둬보면 우리 주위에 감사를 표현할 사람이 가득하다.



기계적 반응 말고 진정으로 감사를 표현했던 최근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교회 소모임 리더는 청년이 한 사람 혹은 두 사람 심지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도 언제나 소모임을 위해 찬양을 준비하고 기도한다. 야근으로 소모임에 많이 지각했던 어느 날, 참석할지 말지 갈등하던 퇴근 길 끝에 모임 자리에 도착했고 그곳에 언제나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리더를 보았을 때 무척 감사했다. 자리를 지켜주어서 고마웠던 것이다. 아파트 1층에서 공동 현관문 유리를 열심히 청소하시는 여사님을 보았다. 뒷모습이었는데 나는 작게 "감사합니다" 말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 순간 여사님은 "안녕히 다녀오세요~ 키도 크고 참 멋지시네!"하며 나의 뒤통수에 칭찬 연발탄을 날렸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작게 일렁이었는데, 작은 감사에도 크게 화답하여 주시는 여사님에 대한 감사와 죄송함이었다. 이런 감사의 순간들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감사를 표현하는 것과 감사의 마음이 품어지는 것의 인과관계는 무엇일까. 표현 후 품어짐일까 혹은 그 반대일까. 마음이 홀쭉할 때 표현할 줄 아는 감사가 보다 단단한 감사일 것이다. 감사가 어려울 때가 자주 있다. 그럴  때 감사를 포기하는 대신 감사를 추구해야 한다. 나는 말뿐인 공허한  주장을 싫어해서 이 문장을 쓰는 마음이 불편하다. 감사를 추구하라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랑 다를 바 없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 문장을 쓴 이유는 감사가 어려울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한 가지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한가지 방법은 주위 어려운 이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다.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위대한 사람이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그들이 타인을 생각하고 호의를 베푸는 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 궁휼의 마음이 품어지고 시야가 달라지기 때문이지 않을까.



꺼져버린 마음이 좀처럼 올라오지 못할 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꾹꾹 눌러왔던 근심 걱정을 토로했다. 나는 그저 들었다. 듣고 듣고 들었다. 섣불리 조언하려 하지도 않았고, 이야기를 듣다가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도 꺼내지 않았다. 섣불리 공감도 하지 않았다. 때로 우리는, 공감받고 싶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때도 있기 때문에. 대신 나는 인내로 이야기를 들었고, 하루종일 굶었다는 친구에게 '억지로' 피자를 배달 보내 먹게 했다. 때로는 말 보다 주린 허기를 채우는 음식 하나가 기분을 전환시켜주기도 하니까. 영혼을 채우는 닭고기 스프리고 하지 않았나?신기한 건, 헐어버린 눈코를 닦아내고 피자를 먹는 친구를 상상하고는 내 마음이 충만해졌다는 점이다.



나에게는 소유와 존재도, 허용과 미허용도, 과정과 결과도, 그리고 감사 마저도 어려운 개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개념들이 결국 한 가지로 나아감을 알고있다. 그건 '더 잘 살기 위함'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세월을 아껴 시간을 잘 쓰고, 궁극적으로 더 잘 살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감사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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