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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 용기

어떤 인생은 한 번만 태어나지 않는다

by 글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세상은 괜한 걸 일삼지 않는다. 해마다 일없이 나이를 세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나이가 의미하는 건 다분히 많다. 어쩌면 그게 나이가 숫자에 불과해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나이의 의미를 따지자면 힘들어지는 게 많으니까.


한 유퀴즈 출연자가 구글에서 이메일로 정리 해고된 뒤 일주일 만에 각종 육체 노동의 일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사연은 위대하다. 그가 각종 현장에서 만나는 숱한 인연들을 통해 진짜 인생을 배워 가는 이야기는 가슴이 뜨겁다 못해 웅장해진다. 그런데 그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로 귀결되니 뜨악하다. 그건 그라서 가능한 거다.


십 년은 젊게 봐주는 대가로 십 년은 젊어야 가능할 일들을 자처해서 기꺼이 해치우는 동안 나의 육체는 전혀 생각이 다르다고, 아니 십 년은 더 먹은 게 사실인데 어쩌라고, 라는 식의 반항을 거듭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그만,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내 몸이라 익히 알고 있었으니 쉽게 수긍했으나 주변인들은 놀라서 아우성 그 잡채였다. 몇 번을 말해야 하니. 이 언니 나이가 몇인데, 얘들아...


개인보다 집단 개념이 발달한 우리 사회에 백세 시대가 도래하니 오십 정도는 껌 취급이다. 인생 2막이라는 미명 아래 새로운 시작이라거나 새로운 노력 같은 걸 강요한다. 인생이 왜 2막뿐이겠는가. 이미 벌써 3막, 4막일 것인데. 막이 바뀐다고 새로운 극이 시작되리라는 건 꿈도 꾸지 마라. 이 극을 책임져야 하는 건 여전히 나이고, 나는 어디까지나 나일 수밖에 없는데, 연출가로서 내가 짜맞추어야 하는 대본이 매일매일 끝도 없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나마 생의 농담인지 위로인지, 어쩌면 나는 선택할 수 있다.


그러고 싶지 않아.

더는 애쓰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나는 선택한다. 경로를 이탈하기로.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하도 이탈해서 경로가 뭔지, 그런 게 있기는 한 건지 다분히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괜찮다. 다 괜찮다. 지금껏 잘 해냈으니 이미 충분하다. 잠깐 멈추고 빈 손이 되어본다.


용기인지 포기인지는 내일의 나에게 부탁하기로 한다. 빈 손이 된다는 게 반드시 밤을 뜻하지는 않으니까. 양손 가득 쥐고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인 경우는 흔하니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다행히 내겐 시간의 무덤에서 한없이 길어 올릴 수 있는 나에 대한 경험치가 있다. 살아오는 동안 숱한 선택을 감행하고 그 선택에 기꺼이 책임져 온 내가 있다. 선택한 뭔가를 최대한의 지구력을 발휘해 버텨내고, 그러고도 안 되는 건 적시에 포기하는 용기가 내겐 있다. 어떤 인생은 버티는 것보다 포기하는 데 더 많은 용기가 요구되기도 한다.


다시 한 번, 나는 나를 믿어본다. 그러자, 나에 대한 그 모든 의구심과 두려움을 밀어내고 내가 내린 선택의 주인이 나 자신이라는 것에 무한한 긍지가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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