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이주일이 우리나라를 주름잡은 이유?
고(故) 이주일을 일필휘지로 작성하며 평가해 보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콩나물 팍팍 무쳤나. 수지큐. 대머리. 특유의 말투. 하춘화의 은인'. 이 정도면 아실 텐데...... 더 힌트 축구광. 배우 이덕화와 가수 조용필의 술친구. 그렇다. 정답은 고(故) 이주일 씨이다.
이주일(본명. 정주일)에 대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이 분의 신상을 쓰는 것보다는 왜 이분이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고, 많은 연예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자 성대모사의 롤모델로 인정받는지 등 여러 방면을 알아보고자 한다. 다소 퀄리티는 부족할지언정, 최선을 다해 남겨보겠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이주일은 대기만성형의 연예인이자 코미디언이었다. 40대에 방송에 나왔으니, 그전에는 무명 아닌 무명을 오래 겪었다. 밤무대 mc, 우리가 잘 모르는 여러 행사에서 mc를 담당하며 많은 고생을 했다. 그 고생 속에서 그는 자신의 장기와 개그의 천부적인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고 발달시켰다. 이런 와중에 큰 사건이 터졌다.
이리역 폭발사고, 1970년대를 겪으신 분들은 다 알고 있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은 사고이자 부끄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리역(지금은 익산역)에 있는 화물열차에 각종 화약들을 실은 상태에서 부주의로 인해 대형 폭발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이주일 씨가 mc를 하던 장소까지 영향을 주었다. 당시 최고의 가수인 하춘화 씨가 그 여파로 대피하면서 이주일 씨가 구해준 것이다. 그 은혜를 하춘화 씨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으며, 하춘화의 도움으로 이주일은 공중파로 갈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는 당시 외모가 너무 뭐라 할까...... 독특했다. 지금이야, 다양하고 개성 있는 얼굴로 스타가 되어 여러 방송과 미디어에 출연이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외모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주일은 그 외모가 너무도 특이해서 방송 관계자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그리고 탈모까지 있었으니...... 하지만 못 먹어도 고라는 심정으로 방송 출연을 했고, 대박이 났다.
그의 행동과 말투, 모든 것이 대중들의 시선과 함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1980년대 최고의 mc이자 코미디언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무명 시절을 겪으면서 쌓은 내공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서 그는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21세기인 현재도 이주일의 아성을 넘보는 예능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
이렇게 이주일은 우리나라 방송을 종횡무진했다. 그리고 밤무대 분야까지 진출했으니 더더욱 명성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머무는 상태가 꽤 지속되었다. 더구나 당대 최고의 배우인 이덕화, 오빠 부대의 원조 가수 조용필과 친분이 생기면서 더더욱 그는 승승장구를 했다. 출연한 만큼 수입은 엄청났고,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연예인 1위로서 탄탄한 입지까지 쌓았다. 대단한 존재였던 것이다.
과거의 영상을 봐도 그의 무대 매너와 게스트를 잡는 코미디 속에 녹아드는 재치와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까지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고, 말끔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그는 존경의 대상이자 레전드 아닌 신으로 추앙받는 스타로 남아있다.
이 명성을 토대로 그는 국회의원 즉 정치계로 진출한다. 1990년대, 당시 연예인들이 정치계로 진출하는 것에 대해 대부분 회의감이 가득했다. 그래서 연예인이 정치계로 진출하여 실패하면 여태껏 쌓은 부와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선거에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서 활약한다.
정치인이 되었을 때, 주변 정치인들은 모두 비웃었다. 코미디언의 황제가 과연 '정치에 정'자라도 아는지 싶은 뭐라 할까. 무시 아닌 무시였다. 그는 이런 비웃음 속에 특유의 재치와 함께 노력하는 학구파 국회의원으로서 역할을 한다. 그의 노력 속에 국회의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고, 주변 정치인들도 그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자신이 뽑힌 지역에서는 최고의 국회의원이었으니...... 그렇게 정치계에서 맹활약을 하고 그는 국회의원으로서 커리어를 마감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이런 명언을 남긴다.
'정치가 더 코미디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주일 씨가 정치를 하는 소위 윗분들의 행동과 양식, 조직 생활과 여러 사항들이 재미있고, 어떨 때는 한심하거나 이기주의적 발상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과 씁쓸함을 대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정치에 대한 환멸과 모멸감, 그리고 정치가 아닌 끼리끼리 식 스타일에 그는 염증을 느껴 이런 명언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 후, 그는 방송에 복귀하지만, 예전 명성처럼 대활약은 하지 못한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그는 1980년대에는 최고의 황제였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그와 연예계의 트렌드가 젊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했다. 자신의 이름을 건 토크쇼였다.
이 토크쇼를 통해 당대 최고의 스타와 소통하고, 그 와중에 예능감을 과시하며 그는 최고의 명성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개그 스타일을 남기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흘러, 그는 60대가 되었고, 점점 연예인으로서의 역할에 집중할 시기였지만, 세상이 그의 몸을 아프게 했다.
'폐암'. 청천벽력이었다. 그것도 말기......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그는 골초였기에 담배가 그를 이런 병에 걸리게 한 주범이 되었다.
* 사실, 폐암에 대한 사항은 논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필자도 정확한 정보를 인지하지 못해서 폐암으로 적는 점 모두 인지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캠페인에 나와 전 국민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호소 아닌 호소를 했다. 과거 최고의 배우 율브리너가 했던 말처럼......(그도 골초였고, 폐암으로 사망한다.)
그렇게 폐암 투병과 함께 그는 소원이 있었다.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대한민국의 활약을 보는 것...... 그는 희망을 가지며 버텼고, 결국 우리나라의 활약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세상과 이별했다.
그의 죽음은 우리나라 모든 국민에게 충격이었고, 안타까움이었고, 눈물이었다. 훈장을 받았고,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조문을 왔다. 엄청난 활약을 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시작은 밑바닥이었고, 무시받았지만, 노력하고 특유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우리 모두에게 큰 웃음을 안기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따라서 이주일은 아직까지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코미디언인 것이다.
아직도 모든 연예인들은 이주일 특유의 목소리를 성대모사로 구사하고 있으며, 선후배들은 그와 함께 있었던 일화를 이야기하며 대중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얼굴은 미남이 아니었지만, 그의 순수함과 열정이 모든 것을 압도했고, 인기는 최고였다.
고 이주일 씨가 최고의 인기를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을 한 번에 사로잡는 기술이 뛰어났다. 모든 것이 통달한 것처럼 말이다. 이를 뛰어넘을 연예인이 없다는 점에서 몇 십 년 동안은 그의 명성이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예능은 우리가 추구하는 예능 프로에 포함될 수 있을 정도의 감각을 남겼다. 그러니 인기가 아직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짧게, 고 이주일에 대한 인물 평가를 해보았다. 현재, 살아있다면 80대이다. 요즘이야, 이 나이면 활약을 할 수 있기에 건강 관리를 잘했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모두에게 남아있다. 그는 진정한 스타였다. 아니, 이주일을 초월할 스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후, 인물 평가 사전이나 위인전에 이주일이 기록된다면 이렇게 평가할 것이다.
'그는 대중을 휘어잡은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다. 범접할 수 없는 특유의 행동임에도 모두 웃게 만들 수 있는 천재이자 테크니션을 갖춘 대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