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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쏭 May 23. 2023

엄마의 질풍노도기

요즘의 나, 작은 일에도 쉽게 버럭 하고, 감정은 하루가 멀다 하고 롤러코스터를 탄다. 어떤 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무기력하고, 또 어떤 날에는 뭐든 해낼 수 있을 것처럼 의욕 충만하다. 이런 날 장을 보면 예외 없이 며칠 후에는 냉장고 야채칸에 방치된 무른 채소들과 유통기한 지난 식재료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때때로 그것들이 요즘의 내 모습 같기도 해서 씁쓸하기도 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여기서 감정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 그나마 나을 텐데, 문제는 그다음 스텝이다. 내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분노와 원망, 그것은 또 다른 강한 에너지가 되어 감정의 풍선을 빵빵하게 부풀린다. 날카롭고 뾰족한, 아니, 둔한 무언가로도 아주 살짝만 건드리면 쉽사리 터지는 풍선 같다. 이럴 땐 어떤 것도 내 곁으로 다가오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다. 이 상태로 며칠을 그냥 두면 풍선은 서서히 바람이 빠지고 힘을 잃을 테니까.


그런데 내 상태를 알리 없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저들은 아무 때고 나에게 몸을 들이댄다. 어떤 날에는 둔하고 미련한 모습으로 나를 뭉개고, 어떤 날에는 뾰족한 말로 나를 찌른다. 아프다 답답하다 말하기도 전에 나는 터져 버린다.


뻥!


오늘도 나는 완전히 ’빵‘터져 버렸다.


체육복 바지를 찾던 첫째 아이가 옷장 서랍을 전부 열어놓고 시위를 한다. 있어야 할 체육복 바지가 없어서 학교에 입고 갈 옷이 없다 한다. 교복이 있건만 올해 들어 교복을 입은 날은 하루도 없다. 불편한 것을 잘 못 참는 아이에게 단정한 자세를 요하는 교복은 꽤나 불편한 옷이 되어 버렸다. 요즘 학교는 단체복의 종류도 여러 가지를 둔다. 교복(동복, 하복) 외에 체육복, 생활복이 있으니 아이들 입장에서 선택폭이 넓어진 것이지만, 교복 한벌을 하루 건너 한 번씩 손빨래하고 다림질해서 입는 수고를 일찌감치 경험했던 나에게 이 많은 옷은 그저 낭비로 여겨질 뿐이다. 옷의 종류가 많지만 아이는 체육복만을 고집하는 상황이라 마지못해 추가로 한벌을 더 구매했었다. 그렇게 두벌의 체육복을 번갈아 입으며 등교를 하던 아이가 오늘은 입을 바지가 없다며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빨래를 안 해서 없잖아. “

”세탁기 돌린다고 내놓으라고 할 때 네가 안 내놨으니 없겠지.“

”아니라고, 나는 내놨다고, 엄마가 세탁기를 안 돌려서 없는 걸 갖고 왜 나한테 뭐라 그래“


화, 분노, 억울함, 적절한 단어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건 분명 내가 화를 낼 일도 분노할 일도 아니건만, 마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아랫사람을 나무라듯 꼬집어 얘기하는 아이의 말에 나는 또 터져버린 것이다. 억울했다. 지난번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건조대에 널면서 아이가 체육복 바지를 내놓지 않았음을 알았고, 도대체 며칠이나 더 입고 내놓으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세탁기를 돌린 다음날 바지 두 벌을 한꺼번에 내놓은 것이다. 빨래를 적당히 모아서 세탁기를 돌리는 것은 내 나름의 살림 철학인 터라 내 입장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억울함은 화가 되어 입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한숨으로 뱉을 수도 있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는 일이건만, 이미 화의 모습으로 둔갑한 나의 억울함은 생전 입에 담아보지도 못한 지저분한 말이 되어 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 내가 네 하녀야? 네가 그렇게 잘 났으면, 옷은 네가 빨아 입어!

그냥 해주니까 넌 그게 네 권리인 줄 알지…너 같은 건… 중략…”


중략해야 한다. 차마 적을 수도 없는 문장들, 엄마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들, 태어나서 어느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말들.

그런 말들을 나는 화라는 감정에 태워 내뱉은 것이다.

아이는 세탁물 바구니 아래에 깔린 두 벌의 바지에서 한 벌을 꺼내 올리며 냄새를 맡고는


”뭐, 아무렇지도 않네!“


자기 암시적인 말을 하고는 조용히 입고 학교로 향했다.


그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조차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왜 이렇게 화를 내? 으이구, 우리 엄마 갱년기인가 봐 ‘, 라며 이죽거리던 아이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 난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감정이 상했고, 그 감정은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잔뜩 부풀린 풍선이 되어 터져 버린 것이다.

 

아이 옷장 서랍을 같이 찾아보고, 옷이 없는 걸 확인한 다음에는 건조대와 세탁 바구니를 확인하며, 태연하게 ”여기 세탁바구니에 체육복 바지가 두 벌 있네“ 했어야 했다. 그럼 아이는 ’엄마 그거 왜 안 빨았어?”라고 똑같이 물을 테고, 나는 “빨래가 충분히 모아지지 않아서 그냥 뒀지. 오늘 돌릴 거야”라고 팩트만 얘기했으면 되는 것이다. 아이는 한숨을 쉬며 조금 툴툴댈 수는 있겠지만, 그중 나아 보이는 바지를 털어 입고 등교를 했을 것이다.

아이가 말한 ‘왜’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문제였다. 아이는 평소의 언어습관대로 ‘왜’라는 표현을 즐겨 썼을 뿐이고 여기에는 엄마의 무책임함을 비난한다거나 엄마를 원망한다던가 하는 그런 ‘의도’ 같은 것은 숨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감정조절의 난항을 겪는 요즘의 나는 아이가 말한 ‘왜’ 한 단어를


“엄마는 집에서 하는 일이 뭐야, 빨래도 안 하고 뭐 했어?”

”엄마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냐?“

“엄마 뭐 하는 사람이야?”


라고 해석했고, 문장의 숨은 뜻까지 내 식으로 분석하며 깊이 감정이입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요즘 야채실에 처박힌 채소 같은 심신 상태인데, 스스로 펄펄 끓는 물속으로 집어넣은 꼴이니, 그대로 뭉그러질 수밖에.

 

아이를 등교시키고 1시간가량 감정정리가 되지 않아 괴로웠다. 1차적으로는 아이의 태도 때문이라는 생각, 저 아이가 저런 식으로 세상을 어찌 살아갈까 싶은 마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는 자책, 한두 시간이 더 지나자 이 또한 나의 문제일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며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1차원적으로 말하는 아이에게는 1차원적으로 대답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나는 오늘도 몇 차원 건너뛰어 아이의 말을 내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았던가.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면 그 감정 그대로 내비쳤으면 되는 것인데, 그조차 엉뚱하게 해석해 분노로 발산했던 것이다.

등교하는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생각했다. 온갖 못 된 말들을 내뱉은 아침이 후회스럽고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라는 이유로 나는 너에게 나쁜 말을 듣는다 생각했지만, 때때로 너는 자식이라는 이유로 엄마의 모진 말을 아무렇지 않게 들으며 견디고 있겠구나. 아이가 하교하면 사과를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나라는, 불편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내 감정이 아무리 널뛴다 한들, 내가 쉽게 빵빵해지는 풍선이라 한들, 그 감정과 풍선의 주인은 나일 텐데 오늘도 괜한 사춘기 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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