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랑한 조각글 Jan 07. 2023

나는 왜 가진 것 없는 부모를 사랑하는가

가난한 시절의 서랍을 열면 무엇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다

아빠가 코로나 중증 환자로 입원했다가 보름 만에 산소통을 들고 퇴원했다. 면회가 금지된 병실 안에서는 아빠가, 집에서는 엄마가 외롭게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동안에 엄마와 아빠는 처음으로 영상통화라는 것을 했다. 안부를 묻는 전화 끝에 엄마가 “우리 다음엔 영상 통화할까?”라고 했더니, 아빠가 “그래? 그럼 지금 당장 하자. 빨리 끊고 영상으로 다시 걸어줘. 얼른!”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전에 엄마는 딸과 사위, 손녀가 있는 데서도 아빠와 영상통화를 했고, 통화 말미에 아빠에게 사랑해~하며 손가락 하트를(엄지와 검지를 가로지르는 그 작고 귀여운 하트 맞다) 날렸다. 세상에나… 얼레리꼴레리다. 아빠는 칠순이 넘었고 엄마도 올해부터 65세 이상 어르신 대열에 합류했다.


아빠는 평생 꿈을 좇았고, 아빠의 꿈은 엄마의 꿈이기도 했다. 엄마는 평생 일하며 아빠를 뒷바라지하고 두 딸을 혼자 키워내느라 뼈가 굵었는데 가끔 크게 싸운 적은 있어도 아빠를 진짜로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는 않는 것 같다. 엄마는 당신의 삶이 의미 있다고 믿기 위해서도 아빠를 사랑해야 한다. 내가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것과 원리가 비슷하다. 다만 남편을 사랑하는 엄마에겐 선택이 개입되어 있고, 부모를 사랑하는 나에게는 유전자의 압력이 크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어릴 때는 엄마 아빠를 원망하고 부끄러워했다. 유년시절에서부터 대학 졸업 무렵까지, 돈을 벌어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내 인생은 우울하고 어두운, 길어도 너무 긴 터널 같았다. 나는 그게 다 아빠의 경제적 무능과 엄마의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삶을 내가 치러야 할 벌이자 재앙으로 여겼다. 가난한 환경과 부모의 못난 출신배경뿐만 아니라 유전자 자체를 저주한 때도 있었다. 삶이 고통스럽고 자존감이 낮으면 내 못난 모습이 아빠나 엄마에게서 온 것 같아 화가 났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식들도 절대 인정 못하는 두 사람만의 세계관 속에서 한 몸처럼 알콩달콩 살아가는 엄마 아빠를 보면 그저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의 퇴원을 축하하며 온 식구가 함께 밥을 먹으면서는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 여유로움과 평화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다른 집 아빠들은 책임감도 있고, 돈도 잘 벌고, 재산도 잘 모으고 부인과 자식들에게 좋은 집과 안락한 환경, 양질의 교육 같은 것을 주지 않나? 어린 마음에 세상을 이렇게 보았다. 세상엔 멋진 아빠도 많고 그만큼 멋진 남자도 많을 것이라 믿을 때였다. 그러나 현실에는 다양한 아빠들이 있다. 돈을 잘 벌어오는 아빠들 중에는 가족에게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는 대가로 부당한 힘을 행사하는 부류도 많다. 또 다른 아빠들은 무능한 데다 자존감까지 낮아서 폭력을 쓰고 가족들을 학대, 착취하기까지 한다. 나의 아빠는 무능할지언정 폭력적이지는 않았고, 어린 나에게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기도 하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를 미워하면서도 종종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아무리 페미니즘 신념으로 무장하고 여성학 책을 수십 권 읽고 여성주의 활동을 하며 남성 지배 정치에 맞서 싸워도 아빠를 오래 미워할 수가 없다. 나는 엄마 몸에서 나왔지만 아빠의 유전자를 80% 이상 가진 것처럼 아빠를 많이 닮았다. 외모부터 성격, 입맛과 버릇까지 다 닮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관절염보다도 아빠의 고혈압이 더 걱정되기도 한다. 내가 물려받을 가능성이 크니까.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빠를 원망하는 마음이 크면 술을 마시거나 길을 헤매거나 일을 그르치면서 자해를 했고, 내 일이 잘 풀리고 자존감이 높아지고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면 아빠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들었다. 작년까지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우울감에 시달리다가 최근에 다시 영혼의 빛을 찾아 의식이 떠오르는 경험을 하고 있다. 아빠가 좋은 걸 보면 내 정신 건강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뜻이다. 아빠를 좋아한다는 건 내 못난 점까지도 너그럽게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그러고 보면 아빠는 팔자가 좋다. 생계를 제대로 책임져 본 적이 없고 꿈을 꾸며 살아도 엄마가 평생 옆에서 응원하고 지지했고, 아빠의 무능 때문에 20대 초반에 수천만 원의 빚을 짊어져야 했던 맏딸조차 아빠를 미워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재밌는 건 이런 팔자조차도 아빠를 닮은 건지, 나 역시 내가 무슨 꿈을 꾸고 이상을 좇든지 묵묵히 지지하고 생계를 책임지며 가사와 육아를 담당해 주는 배우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원망하던 아빠의 나태함, 이상주의, 경제적 무능도 닮았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건 게으름도 아니고 무능도 아니었다. 그저 먹고사는 문제에 초연해질 수밖에 없을 만큼 머릿속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20대에 5년 동안 4천만 원의 빚을 갚았을 정도로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돈만 벌며 살기에는 인생에 의미가 없으니 그놈의 의미를 찾아 안정적인 삶을 때려치우고 무모한 삶의 실험에 나섰다. 이런 점이 아빠와 꼭 닮았다. 아빠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무능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이상주의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빠보다 운이 좋아서 세상을 바꾸는 이상주의자로 살고 있다. 아빠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면 내 삶도 조금은 수정해야 하는데, 나는 내 삶을 수정하기가 싫다. 그래서 자꾸만 말이 길어지는 것이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은 틀렸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과 달리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은 부모가 준비 없이 아이를 낳으며 학대하고 방임한다는 사실이 내리사랑이 틀렸다는 걸 증명한다. 반대로 자식은 반드시 부모를 사랑한다.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엄마에게 학대받는 어린아이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엄마를 찾고 엄마에게 안기고 싶어 한다. 부모를 미워하는 마음은 자기혐오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 부모를 미워하기 힘들다. 그래서 부모의 삶에 반기를 들던 사춘기 반항아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고 중장년이 되면 부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게 자신을 긍정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받아들이고 나면 자식은 부모의 삶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나 싫어하던 부모의 삶을 판박이처럼 반복하는 이유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부모는 유리하고, 자식은 불리하다. 이미 승기는 부모가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모가 "너도 너 같은 자식 낳아봐라"하면서 당당한 이유가 이것이다.


나중에 자라서 부모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그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식들은 복 받은 것이다. 부모의 학대와 방임 속에서 큰 사람은 부모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사랑해야만 하도록 구조 지어진 관계를 부정하려니 우울증을 비롯해 여러 형태로 마음의 병을 앓을 확률이 높아진다. 패륜을 저지르는 사람은 이미 지옥 속에 살고 있다. 자존감이 높고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은 결코 부모를 죽이지 않는다. 부모가 비윤리적이고 타락한 사람일 때 그 자녀는 자기의 핏줄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게 된다. 부모의 삶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자기를 검열하고 행동을 통제할 것이다. 이런 삶은 처음에는 괴롭겠지만 일단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면 자존감이 높아질 것이다. 부모가 준 삶의 조건들을 뛰어넘어 자기 삶을 개척했으니까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보다 더 확신에 차고 강인할 것이다. 그러나 뼈를 깎는 노력이 없다면 대부분은 부모와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유전자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인 요인 때문이다. 알콜중독자에 폭력 가장인 아버지를 이해해버린 아들은 똑같이 알콜중독자에 폭력 가장이 된다. 부모의 비윤리적이고 타락한 모습을 물려받은 자식도 지옥에 살고 있다. 그런 삶을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식들은 영문도 모르고 고통스러운 삶을 반복하고 또 그것을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다.


부모를 미워하는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부모를 원망하며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뿐 무지개를 잡으러 떠나는 사람처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그 마음속은 치열한 투쟁으로 가득할 것이다. 결론은 부모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럽다는 게 아니다. 부모를 미워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자기를 혐오하고 학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동정과 연민을 표현하고 싶다.


자기를 학대한 부모와 화해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자기혐오에서 벗어 나올 수 있을까? 쉽지 않지만 가능할 것이다. 우선 부모를 대체하여 친밀감을 나누고 정신적, 심리적으로 지지해줄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배우자를 통해 지지와 안정을 찾으려 하고, 이런 시도는 때때로 성공한다. 유명 연예인들의 이야기 등 몇몇 성공사례를 보면 결혼이 탈출구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자기를 혐오하는 사람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상 대부분은 실패한다고 보아야 한다.


학대당한 아이들 중에 진짜로 성공한 케이스들은 외롭고 치열한 내적 투쟁을 거친 사람들이다. 나 역시 내가 나이를 먹어서 자연스럽게 부모의 삶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에 걸친 방황과 반항과 질문과 투쟁이 있어서 비로소 부모의 삶과 나의 삶을 분리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빠와 닮았지만 아빠가 아니다. 엄마와 아빠는 지금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렇게 화가 나지 않는다. 만나면 같이 웃으며 즐겁게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


평생의 질문이란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나는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지금도 답을 찾아 나가고 있다. 아직까지  답을 다 찾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좋은 삶은 결코 부모에게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은 삶은 매 순간 치르는 내적 투쟁과 진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본문 어딘가에 "나는 왜 엄마를 닮지 않은 걸까. 엄마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자기주장이 강하다."라고 쓰다가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성실하고 책임감 있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엄마 닮았네, 나...

작가의 이전글 내 방, 책장, 그리고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