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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조각글 Jan 11. 2023

여덟 살, 선교원과 지하실의 기억

가난한 시절의 서랍을 열면 무엇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다

집이 가난해서 유치원을 못 다녔다. 80년대 중반이었던 그 시절은 영유아보육법이 공포되기도 전이기에 유치원이나 유아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그래도 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수만 있다면 보내고 싶어 했고, 웬만한 형편의 아이들은 단 몇 달이라도 유치원 문턱을 밟아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어릴 때는 내가 유치원을 못 다닌 게 이렇게 평생 한이 맺힐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동생은 운이 좋았다. 내가 국민학교 입학하고 동생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이 다니던 교회에 선교원이 생겨서 동생은 1년 동안 이 선교원을 다닐 수 있었다. 그땐, 아깝다…선교원이 1년만 일찍 생겼다면 나도 다녔을 텐데...라고 아쉬워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자 동생을 돌봐줄 언니가 없어졌고, 엄마는 그래서 할 수 없이 둘째를 선교원에 보낸 것이다. 선교원 보내는 데도 다달이 돈이 드는데 1년 일찍 생겼다고 나와 동생을 나란히 선교원에 입학시켰을 리 없다. 그럴 돈이 없었을 것이다.(동생은 나와 두 살 차이지만 생일이 빨라 일곱 살에 입학했고, 학교는 연년생처럼 다녔다.)


어느 날 어린 내가 엄마와 함께 선교원에 갔다. 깔끔한 옷을 차려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선교원 문을 열었다. 동생은 일 년 동안 다닌 곳이지만 나는 그날에야 처음 들어가 보았던 것이다. 선교원은 집에서는 구경할 수도 없던 온갖 장난감, 교구들로 가득했고,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들이 웃으며 반기는 곳이었다. 사방 벽면에는 어린아이들이 만든 작품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빈 요구르트 통으로 만든 인형이나, 일회용 접시에 꾸민 가면 같은 조잡하지만 귀여운 작품들, 아이들의 사진도 예쁘게 꾸며져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작품들 속에서 자기 것을 찾아보라면서 동생이 자랑스럽게 웃는다. 그날은 동생의 전시회와 발표회가 있는 날이었다. 나는 역시 내 동생이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고, 엄마와 함께 동생의 작품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동생을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나는 친절한 선생님들이 챙겨 주시는 간식을 먹었다. 그날 먹은 간식이 후렌치파이와 요구르트였다는 것까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나는 동생이 부럽다고 생각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만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어쩌면 그때 나에게는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이 무섭게 싹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선교원 때문은 아니지만, 그 무렵 겪었던 엄청난 일이 내 안에서 원망과 미움을 키우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를 리 없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웃는 동생 때문에 화가 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화내는 방법을 몰랐고, 착한 아이였기 때문에 기억을 억누른 채 착한 언니 역할을 하며 가면을 쓰고 지냈다. 내면의 화를 표현하려면 무서운 사건을 떠올려야 하는데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도 큰 일이었다. 나는 마음속에 비밀의 방을 만들고 그 안에 모든 것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자물쇠로 꽁꽁 잠가 버렸다.


아주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나는 확실히 동생을 좋아했고, 잘 챙기고 사랑하는 언니였다. 동생은 다혈질인 엄마의 성미를 닮고 나는 조용한 아빠의 성격을 빼닮아 사춘기를 지나면서 큰 싸움이 여러 번 일어났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 일이 생겼다. 나는 동생과의 관계에 대해 동생의 변덕스러운 성미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내가 마음의 벽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기로 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내가 동생에게 이중적인 마음을 품게 된 것은 훨씬 전부터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기억 저편으로 완전히 묻어놓고는 되도록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어떤 날의 사건 때문이다. 그 사건은 내가 국민학교에 막 입학하고 동생은 선교원에 다니던, 우리 자매가 각각 여덟 살, 여섯 살이던 때쯤 일어났을 것이다.


나와 동생은 엄마를 찾으러 교회로 가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는 꽤 먼 거리였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교회는 집에서 10분 거리밖에 안 되었을 것이고,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이웃으로 살고 있었기에 동네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우리가 다니는 세탁소도 슈퍼도 정육점도 다 교인이 하는 곳이었고, 동생이 다니던 선교원도 그 근처의 상가 건물에 있었다. 어떤 아저씨가 길을 물어왔다. 몇 살인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된다. 아이들은 어른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우니까. 아빠보다는 젊은 아저씨였다고 기억한다.


OO교회가 어딘지 아니? 아저씨가 못 찾겠어서.

저 쪽에 있어요. (우리는 서서 그쪽 방향을 가리켰다.)

너희 참 착하구나. 자 이거 받으렴. (하고 100원인지 200원인지를 손에 쥐어 주었다.)

아저씨가 혼자 못 찾아갈 것 같은데 혹시 조금 더 자세히 알려줄 수 있을까? 이쪽으로 해서 저렇게 가라는 말이니?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와, 너 정말 똑똑하구나, 아저씨 좀 데려다줄 수 있어? 그러면 500원 더 줄게.  


정확하진 않지만 아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대화다. 500원이면 당시 어린이에게는 꽤 큰돈이었고, 가난한 우리에겐 더 큰돈이었다. 나는 칭찬에 메말라 있는 애정결핍의 장녀였던 데다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 걸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좋은 사람 같았고 길은 눈 감고도 찾아갈 만큼 쉬웠으며 동네는 안전했다.


그 아저씨랑 어떻게 해서 지하실인지 아니면 어떤 건물의 어두컴컴한 계단 아래인지로 들어가게 된 것인지 모른다. 기억에 없다. 그냥 어느 순간 나와 동생은 지하실 어두운 벽에 붙어 서로를 의지하고 앉아 있다. 아저씨는 동생에게 동전을 더 쥐어주며 "언니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눈 좀 감고 있어 줄래?" 했다. 나는 그때부터 떨었던 것 같다. 동생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돈 때문에 말을 잘 들었던 것이다. 아저씨는 여덟 살짜리 나에게 속닥이는 목소리로 자기 성기를 만져 달라고 했다. 나는 소리를 질러야 했지만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동생이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무서움에 목소리가 안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동생은 눈을 감은 채로 얌전히 있었을까? 나는 싫다고 했고, 아저씨는 한 번만 이라고 하며 잠시 조용한 실랑이가 오고 갔다. 그가 내 손을 잡아 자기 성기에 갖다 댔고 나는 무서워서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린 순간, 울음이 터지는 내 입 속으로 그의 성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나는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을 지금까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때 동생이 눈을 뜨고 같이 울면서 악을 썼고, 아저씨는 미안하다, 미안해.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거기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도 기억에 없다. 기억이 띄엄띄엄... 동생과 내가 길을 걷고 있다. 다시 엄마를 찾으러 가는 길이고 우린 엉엉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웃이자 교인인 어른이 "너희들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는데 동생이 "어떤 아저씨가 언니한테..."라고 말하려는 걸 내가 막았다. "엄마 찾으러 가요." 태연하게 말하고 동생 손을 잡아끌고 무작정 걸었다. 나는 단단히 동생의 입단속을 시켰다. 엄마가 돌아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동생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절대로 알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왜였을까.


여덟 살짜리 아이가 왜 엄마에게 이걸 숨기겠다고 작정했을까. 동전 몇 개에 낯선 사람을 따라갔다고 혼날 것 같았다. 엄마는 분명히 나를 혼냈을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몰랐어도 불결하고 더러운 행위에 내가 말려든 건 확실했다. 엄마는 나를 마구 혼내고 나서 내 자유를 빼앗았겠지. 아니 사실 엄마는 내 자유를 빼앗을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가난한 엄마는 돈 버느라 바빠서 나를 보호할 수 없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그게 금지된 행위라는 것을 알았을까, 내 탓이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더러워졌다고 생각했을까… 아마 자라면서는 그 경험이 나를 더럽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종교의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결코 이 일에 관해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성인이 되었다.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페미니즘 운동을 하면서 가까운 자매들에게 이 경험을 털어놓았을 뿐 아동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만나 연대하면서도 내 문제를 적극적으로 들여다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도 아동성폭력 피해자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그것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잘 살아왔고, 서른이 훌쩍 넘어 마흔이 되는 나이에 그걸 끄집어내서 어쩌겠다는 것이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붙들고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이 안타깝고 불쌍한 동시에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인생의 유일한 구원자여야만 했다. 기억을 묻고 살았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피해 당시에 관한 기억을 억압하거나 망각하는 것은 아동성폭력 피해자의 가장 큰 방어기제이며,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아동성폭력 피해 규모라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제 많이 알려져 있다. 나도 숨겨져 있는 비참한 이야기 중에 하나였다.


페미니스트가 되고 난 후에 동생이나 내가 모두 나이 사십이 거의 다 되어서, 각자 딸들을 키우는 엄마로 살고 있을 때 동생에게 슬쩍 그날을 기억하는지 떠본 적이 있다. 동생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여섯 살은 너무 어리기도 하고, 그 일을 직접 겪은 것은 나지 동생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동생은 단 며칠 사이에 그 일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금쪽이였다. 나는 동생을 원망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동생이 함부로 떠벌리면 내가 나락으로 갈 것 같아서 나는 동생의 기억을 억압했고 아무일 없다는 듯 행동했다. 선교원에서 자기가 만든 작품을 자랑하며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고 엄마의 함박웃음을 독차지하고 있는 동생이 미웠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동생을 지키느라 모든 것을 혼자 감당했는데, 동생은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엄마를 원망한 것 같기도 하다. 분명히 길에서 만난 집사님이 우리가 울며 걷는 것을 보았고, 그 사실을 엄마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엄마가 물어봤는데 내가 대답을 안 했어도 엄마는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입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엄마는 알아봐 주고 나를 도와주어야 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착하고 든든한 맏딸이었지만 나는 나를 보호하지 않는 엄마에 대한 적개심을 내면에 숨기고 자랐다.


나에게 가난도 결국 그런 의미다. 가난해서 뭘 못 가져서 서러웠던 기억보다 가난해서 방치되고 보호받지 못한 것이 서럽다. 공부를 많이 못한 것, 유치원에 못 다닌 것, 학원 한 번 못 가보고 학창시절을 보낸 것이 아쉬워 공부 때문인 줄 알았는데 사실 내가 원한 건 관심과 보호였던 것이다.


모든 생각들이 희미하고 확신할 수 없게 뿌옇다.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동생이나 엄마를 원망한 게 맞는지, 착한 아이라는 칭찬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던 게 그즈음인지, 그때부터 세상을 보는 시각이 삐뚤어지기 시작한 건지, 이게 모두 나중에 덧붙여진 해석인 건지 아니면 진짜로 그때 내 마음이 정말 그랬던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그때부터 뭔가가 변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린 내가 아무렇지도 않았을 리가 없다.


오늘 아침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고 정리하면서, 오열하는 오은영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했다. 선생님은 금쪽같은 내 새끼 스튜디오 왼쪽에 앉아있고 나는 금쪽이가 되어 비밀의 방에서 코끼리한테 진실을 말하고 있다. 스튜디오가 울음바다가 된다.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신애라 배우가 말한다. 금쪽아 네 잘못이 아니야. 너를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이 잘못한 거야. 장영란 씨는 우느라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할머니가 된 내 엄마는 부모석에 앉아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에 충격받는다. 엄마가 눈물을 흘린다. 나는 여기까지 상상하다가 눈물이 쏟아졌다.


내 10대와 20대는 말할 수 없는 경험들로 가득 차 있다. 수치감과 분노, 억울함과 부끄러움이 섞여서 어둡고 컴컴한 지하실의 악취와 함께 묻혀 있다. 그러나 겉으로는 가족과 친구들, 학교와 직장에서 만나는 누구에게나 바르고 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잘 구축해 왔다. 내가, “사실은 제가 내면이 어두워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 겉모습을 보고 그런가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그렇군요. 라고 심드렁하게 말한다. 내면에 어둠을 안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나는 필사적으로 내가 아동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며 그 사건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행동하려 애쓰면서, 혹은 그 사건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이 조금도 없는 것처럼 겉을 꾸미고는 동생이나 엄마가 기억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유년시절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아무 문제도 없을 것처럼 사회생활을 잘해나가면서도 누가 내 속마음을 알아차려 주지 않는 것이 그렇게 섭섭하다. 여보세요, 저 죽어가고 있어요. 제가 사실은 환자예요. 제가 많이 아파요.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지만, 여전히 태연하게 사람들을 대한다.


"너 같은 부류가 모범생이지" 이런 말을 들었다. 아니, 난 모범생이 아닌데. 라고 말하면 모두들 웃는다. 넌 모범생이야. 더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과 완벽주의 성향이 너를 겸손하게 만드는 거지. 네가 모범생이 아니면 누가 모범생이겠니? 진짜 문제아는  그렇지 않아. 라고… 아니, 내가 문제아고 내가 금쪽이다. 그러니 모두 내게 관심을 가지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분석하고 금쪽 처방을 내놓으란 말이야!라고 외치고 싶다.


나는 이제 어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미처 자라지 못한 내 안의 여덟 살 금쪽이는 사람들이 알아주길 원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 안의 여덟 살 금쪽이를 위해서, 그리고 마흔다섯 살의 나를 위해서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말하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진실되게 나를 바라보기 위해서,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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