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FP 동생 이야기 #5
죽음에 대해 별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어리석게도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만약 가족을 잃는다면 그 후의 일상은 어떻게 흘러갈까, 그냥 궁금했던 적만 있다.
일상이 계속 흘러가는 것이 무척 잔인하다고 느껴진다.
내 곁의 모든 것이 그냥 멈춰있었으면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 중간중간 생각한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의, 특히 나이 든 부모의 상에
그저 의례적으로 조의를 건넨 것이 매우 미안하다.
이렇게까지 슬픈 일인 줄 몰랐다.
아무튼 내 마음이 어떻든지 간에
하루가 무섭게 먼지는 쌓이고 쓰레기는 안 버리면 늘어가니
애써 집 정리를 하고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 울다 만 꼴로
학교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고
아이들이 나오면 급히 집으로 들어온다.
그새 눈물이 터질 것 같으니까.
아빠가 이렇게나 예쁘다 예쁘다 하시던 손녀
굶길 수는 없으니 끼니 챙겨 먹이고,
그것마저 좀 힘들어
한 끼 좀 쉽게 때워보려고 맥도널드를 픽업한 어느 날,
햄버거가 든 쇼핑백을 보자마자
시큰둥하던 아이의 반응은 역시나
“맛이 별로네. 그만 먹어도 되지?”
내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아빠였던 만큼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뱃속의 아가야, 할아버지를 닮으렴.'
이라고 여러 번 얘기했었다.
그런데 내 아이가 태어나고 보니 할아버지와 똑 닮은 것은 바로 입맛.
아빠는 음식에 무척 까다로우셨다.
사람이 살면서 잘 먹고 잘 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아빠의 뜻은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였던 것 같다.
자라면서 우리 집에는 금지된 음식이 엄청 많았다.
아빠는 집 냉장고에 탄산음료가 들어있는 꼴을 절대로 못 보셨고
햄버거 패티와 너겟을 무슨 고기로 만드는지에 대해 장시간 설명을 하곤 하셨다.
피자 한 번 시켜 먹었다가 온 집안에 나쁜 재료 냄새가 진동을 한다며
한 겨울에 문을 활짝 열고 한참 환기를 시켜야 했다.
은퇴 후 10년여간 아빠는
시골집에서 먹거리를 키우고
최소한의 재료로 맛을 내 음식을 직접 하는 것을 재미있어하셨다.
그리고 꼭 지켜야 하는 아빠만의 원칙이 무척이나 많았다.
아침 식사는 늘 같은 메뉴로. 삶은 달걀,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야채, 보이차.
음식에 후추는 절대 넣지 말고.
콩나물무침에는 들기름.
삼겹살 수육은 보이찻잎만 넣고 삶아야 하고,
닭은 꼭 하나로마트의 토종닭을 사야 하고 등등.
그러다 보니 외식도 매우 어려운 문제였는데,
아빠 마음에 쏙 드는 음식점을 정해놓고 그곳에서만 사 드셨다.
아빠의 엄격한 기준에 통과한 단 두 곳은
시골집 근처 두부 요리 집과
서울 집 근처 막국수 잘하는 집.
막국수 집에서도 평범하게 주문을 하지 않으셨다.
"물막국수 한 그릇, 그런데 김, 깨, 다대기는 빼고."
그건 그냥 국물에 면인 건데, 그러려면 물과 면이 얼마나 맛있어야 하는지…
솔직히 나는 동네 밥집에서의 저런 커스텀 오더가 부끄럽곤 했다.
아빠가 한 곳만 정해놓고 다니셔서 워낙 금방 단골이 되다 보니
사장님이 반갑게 나와 주문을 받아주실 때야 괜찮았지만,
지친 알바생이
"네? 김, 깨, 다대기를 다 빼라고요????"
라며 의아한 얼굴을 할 때엔
‘그냥 대충 메뉴에 있는 대로 시키시지...’ 싶었다.
나는 괜한 반항심에 일부러 내 걸로는 다대기 잔뜩 들어간 비빔막국수를 시키기도 하고
아빠에게 “오늘은 그냥 평범하게 시켜요. 위에만 숟가락으로 건져내면 되잖아요.”라고 말해 보기도 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빠는 특유의 큰 목소리로 "김, 깨, 다대기 빼고."를 매번 또박또박 외치셨고,
그 옆에서 내 아이는 할아버지가 덜어주는 막국수를 참 맛있게도 받아먹었다.
아이가 막국수를 워낙 잘 먹길래
남편과 아이와 강원도 여행 중 막국수 맛집에 일부러 들린 적이 있었다.
국물에서 후추 냄새가 난다며 손도 안대는 아이를 보고
아빠와 함께 여행 온 줄 알았다.
아빠의 깊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햄버거도 피자도 좋아하는 어른으로 커버렸는데,
그런 엄마 옆에서 햄버거와 피자는 아무리 먹어봐도 영 별로라며
콩나물무침 얹은 밥 한 숟가락을 먹는 내 아이.
2023년 12월의 마지막 날 아침에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들은 내 아이는
할아버지 손잡고 산책한 다음에 막국수 먹으러 가는 게
내가 한국 가서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라며 엉엉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