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FP 동생 이야기 #6
아빠가 떠나신 지 한 달 하고 이십오 일.
날짜를 세는 버릇이 생겼다.
우리 아빠는 날짜 세기도 편하게 딱 12월 31일에 가셨다.
뜬금없는 순간에 눈물은 왈칵 잘도 난다.
네 살 된 둘째가 놀다가 어디에 부딪혔다며 울음을 터트렸을 때,
아가를 달래다가
내 자식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이렇게 안쓰럽고 속상한 일이구나.
내가 맨날 울어서 우리 아빠도 많이 속상하겠네?
라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엉엉 울어버렸다.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도 싫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이젠 싫어졌는데 어쩌나.
열심히 살아낸다는 건
뭔가를 참아낸다는 건데,
나는 어쩔 도리 없는 슬픔을 참아내느라
'참기'의 절대량을 다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다른 것에 대해서는
참을성이 무척 없어지고 있다.
그래도 가끔
마음이 좀 괜찮아져 책이 눈에 들어오는 날도 있다.
아빠는 볼만한 책과 영화와 신문 기사의 링크를 나에게 늘 메일로 보내주셨었다.
책을 좋아하는 내 모습을 아빠가 참 좋아해 주셨었는데...
이제 더 이상 아빠의 추천을 받을 수 없다 보니
나와는 영 맞지 않는 독일 책을 골라 버렸다.
<Tod, Trauer, Trost>. '죽음, 애도, 위로'라는 제목의 책. 나에게 와닿을 줄 알았다.
이 책 읽고 아예 슬프게 맘껏 울어버려야지 각오했는데
앞에 몇 페이지 읽고 확 덮어버렸다.
슬프기는커녕
'인간에게 위로라는 것이 필요하기는 한가? 진정한 위로라는 것은 가능한가?
위로의 개념은 본질적으로는 어쩌고 저쩌고...'
어휴. 깐깐한 독일인이 내 앞에서 지루한 수다를 끝없이 늘어놓는 기분.
독일 책은 덮어버리고 커피를 한잔 더 내리고
좋아하는 책 <수시로 수정되는 마음>을 또다시 읽었다.
'나도 내가 갖고 싶은 행복의 모양을 만들어야지,
그래서 세상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지, '
마음을 다잡아 보고
<스타벅스 일기>를 읽고
그래, 나도 이제 집에만 있지 말고 스타벅스에서 일을 해보자.
계획을 세워보고,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를 읽으며
세상이 이렇게 급변하고 있다니까. 나도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역량을 갖춰야 해,
라며 좀 의욕적이 되어보려는 와중에,
낮잠 자던 둘째가 잠결에
이 인형 저 인형을 내놔라 이불을 이렇게 저렇게 덮어줘라
라고 하니
갑자기 급발진하여 작은 아가에게 소리를 꽥 질러 버렸다.
왜 이렇게 엄마를 힘들게 하니!
아가가 잠결에 그러는 것쯤이야
아주 사소한 일이고 늘 있는 일인데
화가 왜 이렇게까지 치밀어 오르나.
스타벅스에서 작업이 웬 말이고 세상의 변화에 뭘 맞추나.
내 아이 기분 변화 하나 못 맞춰서 쩔쩔매면서.
그렇게까지 소리 지를 일도 아닌데 아이한테 괜히 왜 그랬지.
내 심리가 지금 무척 불안정하구나.
그렇지만 이 상태를 나아지게 하고 싶지도 않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기 싫고
열심히 하기가 싫다.
슬퍼서 그런 것일 수도,
슬픔을 핑계삼은 나의 게으름일 수도.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 죽음 이후 남긴 메모를 모은 <애도 일기>를 보니
와닿는 부분들이 무척 많다.
그래도 저런 애도하는 와중에 바르트는 열심히 연구하고 강의하고 글 쓰고 다 했던데...
나는 못하겠다.
아, 이게 바로 저 책에 나온 자기 비하이자 뒤틀린 마음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