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FP 동생 이야기 #7
나의 20대와 30대를 통째로 대학이라는 기관에서 보냈으니
40대부터는 내가 좀 더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방향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읽고 있는 <인디펜던트 워커>.
"한 개인으로서 1) 전문성을 쌓고 2) 자기를 지키면서 3) 더 나은 일과 삶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기록"이라는 것이 이 책에 나온 설명이다.
책에서 이런 부분을 만났다.
"독립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루틴을 찾는 게 중요하다."
자신에게 맞는 루틴.
아빠는
아빠에게 맞는 루틴으로 지내시다가 79세 12월 31일에 홀연히 떠나셨다.
새벽에 일어나 맨손체조로 하루를 시작하고
8시 아침 식사로 채소, 과일 등과 보이차, 철관음, 우롱차와 같은 중국 차.
아침 식사를 마치면 뉴스 읽는 시간.
노트북을 켜고 한국과 독일의 주요 뉴스 사이트들을 꼼꼼하게 훑으셨다.
내가 옆에서 보다가
"아빠 노트북이 왜 이렇게 느려요. 당장 바꿔야겠어요."
하면
"아빠는 너네들처럼 바쁘지가 않아.
아빠는 시간이 많아서 화면이 빨리빨리 뜰 필요가 없는 사람이란다.
보고 싶은 기사 클릭하고
차 한 번 내리고
화면 뜨는 거 기다렸다가 찬찬히 보면 된다."
라며 새 노트북을 절대로 못 사드리게 하셨다.
뉴스를 다 읽고 나면 12시로 정해져 있는 점심시간 전까지
시골집에 계실 땐 집 안팎을 왔다 갔다 하며 손이 갈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집 관리를 부지런히 하셨고
서울집에 계실 땐 구청 은행 세무서 우체국 세탁소 등에 볼 일을 보러 다니셨다.
그리고 12시 딱 맞춰 점심을 드신 후에는
30분 간 낮잠을 주무시고
그다음에는 운동으로 헬스나 산책 매일 2시간씩,
운동 후에는 마트에서 장을 보는 루틴을 평생 지키셨다.
아빠의 마지막 날이었던 2023년 12월 31일도 예외는 아니었어서,
반듯하게 접힌 장바구니 안
2023년 12월 31일 오후 5시
가 찍힌 이마트 영수증이 참 슬펐다.
저녁 식사도 6시 딱 맞춰 하셨는데,
저녁으로는 밥보다는 누룽지나 국수 같이 소화가 잘 되는 가벼운 음식을 드셨다.
저녁 드시자마자 양치를 하시고 잠옷으로 갈아입으신 뒤에는
텔레비전 시간이었다.
국내 뉴스 프로 한 개 보고, 그다음에는
넷플릭스나 올레 티비로 미국, 영국, 중국의 드라마 또는 영화를 보시고
일찌감치 밤잠을 주무셨다.
특별한 행사나 일정이 없는 한 이 루틴으로 지내셨기에
우리 가족은 아빠에게 전화할 일이 생기면
'지금 아빠 ~하실 시간이네.'라고 먼저 예상을 했다.
그리고 아빠는 거의 우리가 생각했던 그 일을 하고 계셨기에
우리는 아빠 때문에 불안한 적이 없었다.
예측 가능함은 함께 사는 가족을 참 편안하게 해 준다.
그런 아빠를 보며 나는 참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은퇴를 했으니 이제 골치 아픈 지식 따위 얻기 싫을 수도 있는데
세상 돌아가는 일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매일의 뉴스와 세상의 변화를 빠짐없이 훑으시며
아빠의 세상 보는 시각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고 개선하시는 모습이 참 멋졌고
(심지어 30대의 나에게 ChatGPT라는 것의 존재와 가능성에 대해 가장 처음 알려준 사람도 70대의 아빠였다!)
배가 고프지 않거나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고 식사를 건너뛰거나
내킨다고 아무 때나 식사를 하는 게 아니라
8시 아침, 12시 점심, 6시 저녁의 패턴을 지키시는 게 좋았다.
그리고 또 좋았던 것은 아빠의 꼿꼿한 자세.
아빠는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아예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딱 정해진 낮잠 시간을 제외하고는 집 어디에서도 누워 계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아빠의 체력과 여력이 받쳐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책도 노트북도 텔레비전도 식탁에 앉아 늘 허리를 펴고 꼿꼿한 자세로 보셨다.
핸드폰을 붙잡고 계신 모습을 평생 보여주지 않은 것도 무척 감사하다.
아빠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핸드폰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현대인이었다.
이미 70대이신데 핸드폰이랑 안 친할 만도 하지, 라기에는 아빠보다 더 나이가 드신 세대도
유튜브와 카톡의 간편함과 마력에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아빠도 스마트폰을 쓰시긴 했는데, 알고리즘의 유혹에서 어떻게 자유로우셨을까?
카카오톡은 지인과 꼭 필요한 연락을 위한 용도로만,
유튜브는 아빠가 직접 검색어를 입력해서 듣는 음악 감상용으로만 제한해서 사용하셨고,
메일을 쓰거나 뉴스 기사를 읽는 등의 '좀 길어질 것 같은' 일은 무조건 노트북을 켜서 하셨다.
휴대폰 속 알고리즘에 무의미하게 뺏기는 시간이 없으니
긴 호흡의 종이책과 주간지를 곁에 두고 읽으셨고,
그래서 아빠에게는 깊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늘 풍겼다.
시간이 많다고 다 아빠처럼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빠의 바른 모습을 보고 자랐다고 아빠처럼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루틴이 확실한 아빠의 삶을 보고 자라며 참 대단하고 멋지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작 나는 루틴 따위 없는 그저 좀 피로하고 게으른 편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구절절 아빠의 루틴을 늘어놓는 이유는
우리 아빠의 성실하고 멋있었던 매일이
문득 사라져 버린 것이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79세까지 지치지 않고 늘어지지 않고
앞서 보았던 <인디펜던트 워커>의 소개 문구처럼
하나의 개인으로 전문성을 쌓고, 자기를 지키고, 더 나은 삶을 향했던 아빠의 루틴을
이렇게 기록으로라도 남겨 놓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고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