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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씨 Jan 31. 2024

애증의 2023을 보내며

보람과 뿌듯함으로 가득했던 지난 22년과 달리, 나에게 23년은 애증의 해였다. 좋았다고 하기엔 괴로웠고 싫었다고 하기엔 또 너무 값졌다. 그래도 정이 들었는지 훌쩍 떠나버린 23년이 문득 그리워져서 끄적끄적 한 해를 추억해 보기로 했다.



23년의 시작은 그전 해 못지않게 다이나믹했다. (참고로 22년의 시작은 갑작스런 실직이었다.) 우리 서비스를 이끈 실장님에 대한 내부고발이 있었고 이 사건이 시발점이 되어 면직되셨다. 서비스의 주축이었던 리더가 없어지자 방향성이 불투명해지게 되면서 팀 분위기가 얼음장 같았다. 이직에 대한 말이 돌기도 하고 한탄 섞인 목소리가 주를 이뤘다.


그렇게 우리 팀은 몇 개월을 방향성 설정을 위해 시간을 썼다. 아무래도 새로운 사업을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어가기에 방향성 설정에 많은 시간이 들었던 것 같았다. 이해가 되면서도 그 사이 방치된 팀원들을 생각하면 조금 원망스러웠다.


몇 개월에 걸쳐 결정된 서비스 방향성은 결국 임원들의 승인을 받지 못했고, 팀은 해체되었다. 팀원들은 다른 팀의 전배 인터뷰를 보러 다녔고 나는 팀장님의 권유 아래 운영하던 서비스의 유지보수를 맡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9월까지의 업무 상황이었다.


회사가 날 방치해두고 있는 사이 나는 일에서 꽤나 멀어져 있었다. 뭘 더 배우고 발전시켜야 하지, 이게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서 재미 찾기가 어려워지자 난 다른 재미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 자취를 시작했던 나는 집들이를 핑계 삼아 친구들과 한참 늦게까지 놀았다. 원래라면 일하며 느꼈을 도파민을 이렇게 충전한 것이다. 또 내 짝 찾기에도 열심이었는데 내 스스로 찾아 나서기도 하고 연애도 안 하고 방황 중인 나를 안쓰러이 여긴 주위 사람들이 많은 소개팅 기회들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일주일에 세 번의 소개팅을 나간 적도 있으니 얼마나 바삐 만나러 다녔는지 알만하다.


그 사이 짝사랑 하던 사람도 지나갔고 썸 타던 사람도 보냈고 넘치게 과분한 사랑을 주던 사람도 모두 떠나보냈다. 설레기도 했고 상처도 받았고 화도 났었고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사람의 감정에 대해 또 나의 감정에 대해 집중해서 고민하던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세 달쯤 지났을까. 화장을 하고 머리를 손질하는 게 익숙해질 때쯤 참 재밌는 사람을 만났다. 목표가 뚜렷한 사람 같아 보였고 칭찬을 곁들인 얘기를 잘했으며 부담스럽지 않은 플러팅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뚝딱거리는 모습이 귀여운 사람이었다.


그러고선 돌연 애프터 신청을 안 해서 내 궁금증을 자극하게 만들더니 왜 연락을 안 했었냐는 나의 물음에, 떨려서 그랬다고 열심히 해명하는 모습을 보여 사람 설레게 만들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땐 재밌는 사람 같았고 두 번째 만났을 땐 진중한 사람 같았고 세 번째 만났을 땐 멋있는 사람 같았고 사귀던 날엔 계속 보고 싶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9월 중순, 그렇게 장장 2년 5개월의 연애 공백기를 마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됐다. 내 1-3분기는 태풍 그 자체였는데, 4분기는 태풍의 눈보다도 맑고 따뜻한 산들바람이 부는 핑크빛 세상이었다.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들쑥날쑥한 소개팅 일정도 없어졌고, 일에 대한 마음가짐만 회복하면 된다 생각하던 와중 타 팀에서 갑작스러운 오퍼가 왔다. 직무는 달랐지만 마침 내가 궁금해하던 도메인의 팀이었고 심지어 C레벨 선에서 연락이 왔던 터라 기대감과 걱정을 양쪽에 한 아름 안고 답장했었다.


관심 있으면 다음 주에 인터뷰를 보자고 하셨고 당일부터 나는 부랴부랴 새벽까지 그 짧은 JD 몇 줄에 담겨있는 요구사항을 외우고 설명하길 반복했다. 놀랍게도 다음 주 예정이었던 인터뷰는 바로 다음날로 바뀌었고 전날 공부하며 이전 기억을 복기해 두었던 나는 비교적 자신감 있게 인터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전날 공부한 내용을 질문하신 건 아니었지만 전날 공부하며 우리 서비스에 기여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을 생각해 본 일련의 과정이 자신감 있게 이 팀에서도 잘할 수 있음을 피력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11월 중순, 그렇게 나는 다른 직무, 다른 도메인으로 전배를 가게 되었다.


하루하루 ’뭘 할지‘ 고민하던 나는 조직이 바뀌면서 ‘뭐부터 공부할지’로 고민의 내용이 바뀌었다. 한숨으로 시작하지 않고 팔 소매를 걷는 것부터 시작한 느낌이라 덕분에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연말을 맞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날 만나고 나서부터 이직 수순을 밟던 남자친구 또한 그 시기 이직이 확정되었고 연말에는 둘 다 새로운 조직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며 함께 하나씩 이뤄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좋았다.


매운맛이었던 지난 시간이 무색하게 2023년의 끝은 행복 속에 웃으며 끝이 났다.



나는 회고하는 것을 그리 즐겨하는 편은 아니다. 그 해를 회고할 때 내가 아무리 평소에 즐겁게 살고 열심히 노력했다 해도 연말의 상황과 기분에 영향을 받아 그 해를 마무리 짓는 게 억울했다. 연말이 뒤숭숭했던 작년처럼 말이다. 근데 이번 해엔 끝이 너무 좋았다. 다음 해가 기대가 됐다.


나를 보니 인간은 참 단순해서 행복을 손에 쥐어주면 그전 과정을 꽤나 미화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렴 어때. 좋은 기억만 남기면 되는 거지.


그래서 이제 그냥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괴로운 상황을 겪었던 것도, 열심히 살았던 것도, 또 열심히 살지 않았던 것도 나니까. 뭐 좋다 나쁘다 할 필요 없이 내 상황에 맞게 행복한 기분을 느끼면 되는 거다.



내년에 바라는 것은 작년에 불안함을 많이 느꼈으니 이번 해엔 불안감을 좀 더 능숙하게 다루는 내가 됐으면 좋겠다. 회사에서의 위치가 내게 너무 큰 존재가 되지 않게 스스로 갈고닦으면서 말이다.


또 기대하는 것은 여유로움을 향유하는 것이다. 노는 데 지극히 인색했던 내가 지독하게 놀아보니 이런 시간이 있어야 또 달릴 힘이 생기고, 이런 경험이 있어야 삶이 다채로워지는 것 같더라. 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전시키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것들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지 생각했다.


나의 우당탕탕 2023을 기록하며, 애증으로 시작했지만 실은 사랑이었다 깨닫고 글을 맺는다. 재밌었고 웃겼고 짜증났고 너무 행복했던 내 2023 안녕. 잘 가!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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