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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석 Jan 02. 2024

담백한 회사 생활

02.

 애증의 첫 번째 회사를 나오며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 회사 일, 회사 사람, 회사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절대 뜨거워지지 않기로.

 

 다음 회사 생활은 꼭 담백하게 하리라. 머리가 아닌 심장에 새겼다.  


 내가 정의한 담백한 회사 생활은 업무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최대한 감정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 한 몸 바쳐 뜨겁게 프로젝트에 임하면 그 일이 성공할 것 같지만 경험상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지나친 열정과 개인의 과한 마음은 자칫 프로젝트를 산으로 보내버리거나 담당자들 간의 관계를 파국으로 치닫게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본인도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수 있다.


 일을 그저 일로만 보고 싶었다. 일 아래 감춰진 사람들의 다양한 사리사욕, 서로 간의 역학관계, 치열한 자리싸움 같은 것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조직 관점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 관점에서만 업무를 접근하고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도 안 되는 일은 '그저 그러마'하며, 마음을 비운다. 담백하게 일하기 위해 동료들과도 적당한 거리를 두었으며 내 개인사 역시 필요이상으로 노출하지 않았다.


 머리와 마음이 뜨겁지 않으니 분노, 좌절, 슬픔 같은 감정을 느낄 일이 줄었고, 막연한 희망이나 기대가 없으니 큰 실망이나 상처도 거의 없었다. 문득 이런 태도는 담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라이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파도처럼 일렁 일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오해는 말자. 소시오패스처럼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혹은 아웃사이더로 회사 생활을 하는 것과는 분명 결이 다르니까. 아직 표현력도 부족하고 태도에 대한 관점도 더욱 세밀한 정리가 필요해 내가 지향하는 담백한 회사 생활에 대해 딱 떨어지게 규정하는 일이 어려워 통탄스럽다.


 그저 일과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나의 온도가 너무 뜨거워지지 않고 끈적해지지 않도록 적당한 온기와 관계의 개운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들을 모토로 새로운 회사에 다니고 있다.






 새해를 맞아 팀 내 업무 및 개인 역할 조정이 필요했다. 파트장으로서 새해 프로젝트 방향에 대해 파트원과 개인 소통 중에 한 파트원이 조심스레 개인적인 사정을 내게 털어놓았다. 평소 워낙 책임감이 강하고 차분한 스타일이어서 전혀 티를 내지 않아 몰랐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지난 한 해 개인적으로 정말 힘들었겠다 싶었다. 나 역시 그 나이 때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적이 있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말을 하다 감정적으로 울컥했는지 연신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는 파트원에게 휴지를 건네주는 내 모습이 아주 오래전 과거의 나와 오버랩됐다. 나 역시 그때 당시 팀장님 앞에서 참 서럽게 울었었다. 무엇보다 마음 아팠던 말은 그녀의 '기댈 어른이 없다.'라는 말이었다. 나도 그 마음이 어떤지 조금 안다. 특히 가족들에게 생긴 문제라면 정말 세상천지 허허벌판에 기댈 곳 없이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드니까. 파트장이라고는 하나 기껏 4-5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나를 감히 기댈 어른이라 칭할 처지가 못되어 위로의 말과 조각 티슈를 건네는 것 외에 달리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퇴근해 하루를 정리하며 과거의 나였다면, 첫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후배가 그런 말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지금과 같이 똑같이 직접적인 해결책을 줄 수 없는 입장이었어도 나는 밤잠을 설쳤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안타까운 마음과 별개로 내 마음에는 큰 동요는 일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첫 회사에서 실망하고 슬프고 분노했던 순간들이 꽤 많았다. 그 말은 반대로 그만큼 기대가 컸고, 바라는 바와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많았으며, 하고자 하는 의지와 책임감도 막중했음을 뜻한다. 영혼을 갈아 일했고, 그만큼 인정받았지만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 같은 법. 시기와 질투, 견제와 각종 구설수들이 1+1처럼 따라붙었다. 결국 나는 몸과 마음에 큰 병이 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났다.


 요즘 나는 무언가에 크게 기쁘지도 크게 슬프지도 않다. 예전 같았다면 힘들었을 후배 앞에서 같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을 내가 고요한 마음과 차가운 손으로 휴지를 건네는 모습이 스스로 참 낯설게 느껴진 하루였다.


 2024. 01.02. 한줄 평

 회사 생활에서 머리만 차가워지고 싶었는데 심장도 같이 차가워져 버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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