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5시였다.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다시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괴로운 생각을 다시 하고 있었다. 그럴 때는 벌떡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야 한다.
괴로운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한 번 들면 하루가 괴롭고 몇 시간을 버티기 힘들 정도로 아픈 기억이 요즘 몇 개 있다. 괴로움이 가득 차면 나는 글을 쓰러 간다. 괴로운 마음에서 그저 흘러나오듯이 글이 한 편씩 쓰인다.
예전에는 아침 일기를 썼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그때는 생각이 아주 많았던 시기였고, 그리고 혼자 방에 내버려 둬도 많이 바빴다. 나는 늘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침 여섯 시에 벌떡 일어나서 아침 일기를 3장쯤 쓴다. 줄줄이 드는 생각을 모두 내놓고 나면 벌써 일곱 시가 되어 있고, 이제 아침을 먹고 아침 연습을 한다.
아침을 먹고 아침 연습을 하는 사이에 나는 그날의 계획표를 짠다. 큰 일만 써서 언제든 쉽게 수정하고 흐름을 알 수 있도록 큰 아이패드 화면에 시간별로 써서 오늘 해야 할 일을 대강 눈으로 훑는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했다. 그랬었다.
오늘 아침에 생각하니 나는 문득 바쁜 사람이었고 늘 피곤해했다. 전에는 악기 연습을 아침 연습 3시간, 저녁 연습 3시간으로 나눠서 했었고 보고 있는 책도 많았고 철학 공부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와 놀기도 하고, 저녁이면 공원에 산책도 다녀왔다. 그때의 나는 나를 좋아했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다는 사실도 조금 신났고 피곤해했지만 친구와 나눈 대화는 깔깔거리며 함께 웃을 만큼 재미있었고 연습 시간은 소중했다.
21년 겨울에 발에 난 생채기에 세균 감염이 된 적이 있다. 발에 통증이 심해 입원을 급하게 했다. 졸업 연주를 코 앞에 두고 있었고 나는 준비가 거의 다 된 상황에서 갑자기 입원을 해서 휴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노트북으로 휴학계를 내고 속상해서 병실에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퇴원을 하고 나서도 많이 아팠어서 괴로운 해였다. 그 한 해가 지나고 나서는 아침 일기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연습을 그렇게 많이 하지도 않았고, 하루 계획을 짜서 읽어보는 짓도 하지 않았다. 생기를 모두 잃어버린 사람처럼 지냈다.
그러고 몇 달을 지냈는데 하루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하늘에 노을이 지면 사진을 꼭 찍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친구가 내게 말하는 나의 특징들을 듣다가 놀랐다. "내가 그랬다고?" 하면서 더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자 친구는 어리둥절하며 내 특징들을 줄줄이 내놓았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거 좋아했고, 그냥 공부하는 것도 좋아했고, 철학도 좋아하고 하늘 사진 찍는 거 좋아해서 찍어서 사진을 모았었고, 그리고 악기 연습하는 것도 좋아해서 늘 일찍 연습실에 와있었고,,
듣다 보니 일 년 전의 나라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나를 잊을 뻔했다니.." 하며 급하게 공부할 책을 찾았다.
지내다 보면 자신을 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견뎌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점은 최대한 덜 아프게 그 순간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나는 '그 시기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쨌든 겪을 고통이라면 최대한 아프지 않게 흘려보내야 한다.
졸업 연주를 못하게 되었다고 속상해하는 내 옆 사람들 중 누구도 내가 힘들어할 거라는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누군가가 누구에게 공감할 것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아무도 내 아픔을 '아픔'이라고 제대로 불러주지 않아서 나는 늘 혼자였다. 그렇게 버티고 나니 나는 나를 잊어버리고 몸이 나을 때까지 얌전히 집에 있으라는 사람들의 말에 익숙해져 바깥에도 나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햇살을 좋아한다. 그리고 아침에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하늘 사진을 잘 찍는다. 그리고 철학이든 미학이든 인문학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미술관을 혼자 다녀오는 것도 좋아하고 피아노 연주회에 다녀오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혼자서 음악을 들으며 산책하는 것도 좋아한다. 이것들이 나였다.
친구에게 내 특징을 들은 뒤로 나는 노트에 받아 적은 문장들을 보고 하나씩 다시 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더는 혼자 있는 시간을 의미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지 않게 되었다.
만약 어느 누군가가 너는 어떤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나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지만 반짝이는 돌을 내놓을 것이다. 그게 나라고. 사람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반짝이는 존재다. 모두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다.
괴로운 기억은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힘들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견딘 시간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괴롭든 즐겁든 어느 쪽이든 잊지 못한 기억은 나를 만든다. 그러니 사람은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
시간이 빛이 되어 그늘을 가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밝은 햇살 저편이 있는 곳에서 고개를 돌려보면 서늘한 그늘도 있다. 발에 박힌 가시처럼 딛지 못한 추억이 있다면 빼내고 걸어가는 것이 맞지만, 우리는 쉽게 그러지 못한다. 그것도 나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쪽이 있으면 저 쪽도 있다. 어느 날 했던 생각이었는데 나는 모두가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세상이 조금은 밝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고개를 조금만 더 돌려보자. 어두운 그늘도 결국은 하늘을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