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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Sep 16. 2024

듣는 일에 관하여

24.06.23 저녁 탁자에서

 어제는 날이 조금 시원했다. 여름도 오지 않았는데 벌써 날씨가 더워져서 요즘은 매일 선풍기 바람 밑에서 잠든다. 저녁 늦게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앞뜰에서 나뭇가지 남은 것들을 태우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앉아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앉아있는데 나는 문득 듣는 일이 어떤 일인지에 관하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 읽었던 어느 책에서도 듣는 일에 대해 읽은 적이 있고, 좋아하던 유튜버도 무언가를 경청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했던 생각인데 듣는 일은 결국 들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게 되는 행동이 아닐까. 듣는 일이 그저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거라면 가만히 앉아하면 되는데, 사람을 듣고 있거나, 그와 관련된 것을 듣는 일에 관해서라면 조금 말이 달라지는 것 같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엄마와 동생과 같이 영화 보러 가는 날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런데 영화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생이 영화가 보기 싫다며 헤드폰을 귀에 덮어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때는 2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일도 뭔가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거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조용한 미술관에 앉아 그림을 마주 보는 일, 영화를 보는 시간,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일, 그리고 바닷가에 앉아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처럼 마음을 기울여 듣는 행위가 내게는 앞에 앉은 대화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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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이 늦어 해가 다 기울어졌을 즈음에 날씨에 맞게 옷을 챙겨 입고 휴대폰과 지갑을 가지고 집을 나서 함께 나온 사람과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하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그날 아침은 어땠고, 점심에 먹은 메뉴는 맛있었으며 저녁에 돌아오는 길이 막막해 피곤했다던가, 오늘은 일이 바빠 정신없이 하루가 가버렸다던가, 그리고 늦은 밤까지 이렇게 걷는 길이 기다려졌다던가, 하는 조용한 옆 사람의 말을 들으며 말하기 좋게 말을 맞춰주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랬어, 그랬구나, 헉, 그래서? 아아, 같은 감탄사들을 말하며 그의 말을 기다리는 순간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저녁이다. 언젠가 같이 살게 될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런 늦은 밤을 함께 지내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상대의 말을 듣기 전에, 집을 나서기 전에 하는 과정과 나란히 붙어서 걷는 행위만큼이나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에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듣는 일은 함께 나란히 서서 걷는 일이다.

 두어 살 어린 친구가 있다. 같이 연습실을 쓰면서 그 친구가 하는 말을 꽤 열심히 들어주었는데, 나는 그 시간을 재밌어하면서도 연습 시간이 늦어질까 봐 조금 서둘러 들으려 했다. 그렇게 두 달을 같이 연습실을 사용했는데, 그 친구는 가끔 그 시간을 기억하면서 '힘들었던 시간이었는데 같이 있어주어서 고마웠다'라고 말했다. 함께 있는 일이 같은 공간에 늘 있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래서 나에게는 듣는 일이 친구를 대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지내며 살아야 하는 동물이다. 서로 어울려 지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듣는 과정을 너무 쉽게 생각하거나 단순하게 취급한 것은 아닐까. 듣는 일에 관해 쓰려니 이런저런 일들이 꽤 많았다. 내가 가장 듣기 좋았던 순간은 소중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때이다. 언젠가 어떤 사람의 말하는 목소리가 음악 소리 같다고 여겼던 적이 있다. 조곤조곤 말하는 말소리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조금 부끄러웠던 적이 있는데, 그런 기억들도 모두 '들었던' 기억이다.

 모든 들음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서로에게 하는 이야기에 더 마음을 기울여 들어준다면 좋지 않을까. 지금 같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기울인다면 듣기 좋은 말을 듣게 되는 날이 더 자주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와 같이 나란히 서서 걷는 일이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어딘가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것을 들어주는 행동이 더 익숙한 세계가 존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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