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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수 Feb 15. 2024

호두를 깨뜨리며

(겉과 속이 다른 나는 아닌가)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시골 고향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우리 가족은 도시로 이사해서 그곳을 떠났지만 흙을 노래하며 고향을 지키는 친구들은 변함없이 땀을 흘리고 있다. 그중 한 친구의 별세 소식을 들었기에 조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인천에서 이른 아침 출발했다. 서해안 고속도로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양 옆으로 펼쳐진 들녘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다음 해를 위해 잠깐 쉼을 준비하는 시간을 달래고 있는 중이다. 


강경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낯익은 얼굴들이 더러 보인다.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안내하는 대로 친구의 영정 앞에 섰다. 순박한 농부의 웃는 모습이다. 어쩌면 어릴 때 마을 어른들이 사물놀이 장단을 맞출 때 친구의 아버지가 신명 나게 장구를 치던 그 얼굴이 겹쳐져 다가온다. 조문을 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옛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여름방학 때는 캄캄한 밤이 오면 편을 나눠 숨바꼭질하던 일, 복숭아와 참외 서리하다 들켜서 황급히 도망치던 일도 잊을 수 없다. 샛강에 나가 벌거숭이로 헤엄치는 용감한 그림을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추억의 장에 숨긴다. 겨울에는 차가운 손을 호호 불며 구슬치기 따먹기를 사간 가는 줄 모르게 했었다. 샛강이 꽁꽁 얼게 되면 두툼한 나무조각을 발바닥 크기만큼 잘라 다듬고 굵은 철사를 구해 다듬은 나무 조각의 가운데를 살짝 칼로 흠을 내어 철사를 길게 늘여 고정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스케이트를 한쪽 발에 붙들어 매고 매지 않은 쪽의 발은 디딤발로 하여 힘차게 달리다 스케이트가 달린 발은 얼음판을 밀고 나가고 디딤발은 바닥에서 떼면 꽤나 멀리 미끄러져 나간다. 누가 더 멀리 갈까? 경쟁하기도 했다. 


고인은 남매를 낳아 양육했다. 아들은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가르치는 일을 한다. 딸은 간호대학을 나와 가정을 지키며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으니 편안히 떠날 수 있으리라.


지난 추억을 얘기하던 장례식장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헤어짐의 손을 잡아 주고 나왔다.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고속도로가 아닌 일반도로 쪽을 선택했다. 전원의 냄새를 가까이에서 천천히 느끼자는 생각에서였다. 도로포장은 어디나 되어 있어 먼지 날리는 옛날이 아니니 느림의 여유도 즐기면 된다. 중간 이정표는 그냥 잊고 지나가기로 하자. 직진만 하면 되는 길이 아닌가. 어디쯤인지 모르나 경사진 도로가 구불구불 흘러가는 곳을  지난다. 평지에 이르니 마을들이 있고 길 옆에 몇 분 할머니들이 콩, 팥, 고구마와 밤, 호두와 대추 등을 조금씩 펼쳐 놓고 있었다. 손수 땀 흘려 지은 수고의 열매를 팔려고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나는 자동차를 마을 쪽에 있는 공터에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가까이 다가가니 한 할머니께서 입을 연다.


"콩이나 팥을 사세요. 직접 농사지은 겁니다."

"밤, 대추도 있고요 호두도 있답니다." 옆에 있는 다른 할머니도 뒤질세라 갖고 나온 열매를 자랑한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살아계셨더라면 엄마도 그런 자리에 앉아있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자 할머니 앞으로 갔다. 

"할머니, 대추하고 밤 그리고 호두를 주십시오. 땅콩도 있네요."  조금씩 갖고 온 것이라 모두 샀다. 큰돈이 지출되는 것도 아닌 듯싶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는 일찍 귀가할 수 있게 돼 좋다고 하며 거듭 인사를 한다. 좋아하는 할머니의 표정을 뒤로하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해가 긴 그림자를 드리울 때쯤 집에 도착했다. 아내에게 사 갖고 온 열매들을 내놓았다.

"골고루 사 오셨네." 

"응, 꼭 엄마 같은 할머니가 길 곁에서 팔고 있기 때문에 사 온 거야."

나는 밤의 겉껍질을 벗긴 다음 속껍질을 칼로 깎아 하얀 속살을 드러낸 밤을 아내의 입에 넣었다. 다시 하나를 깎아 내 입에 넣고 깨물으니 가을 향기가 입 안으로 가득 채워진다. 호두를 망치로 가볍게 두드려 껍데기를 벗기니 속 알맹이가 앙증맞게 들어있다. 입에 넣으니 고소하다. 다시 껍질을 깨뜨리니 알맹이가 검게 상해 있는  게 아닌가? 계속 깨뜨리다 보니 여러 개 새까맣게 썩은 것이 발견되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다양한 이유가 있다. 이는 할머니의 잘못도 아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균의 오염으로 속이 부패되어 망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문득 세상 사람들 아니 나를 돌아본다. 겉은 사회적인 지위로 위장하여 어깨에 힘을 주고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바이러스의 오염으로 인한 부패한 나는 아닌가. 부정과 거짓, 욕심과 위선 등으로 얼룩진 가슴은 아니냐. 속과 겉이 다를 바 없을 순박한 농부 친구의 삶을 생각하는 밤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오염된 속마음을 정화시켜 어린 시절로 회귀하는 결단을 하자. 겉과 속 사람이 같아야 당연한 일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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