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들뢰즈의 사유를 빌려
인간은 욕망한다. 성리학의 칠정(七情)은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으로서 기쁨(喜)ㆍ노여움(怒)ㆍ슬픔(哀)ㆍ즐거움(樂)ㆍ사랑(愛)ㆍ미움(惡)ㆍ욕심(欲)을 일컫는다. 여기서 마지막, 욕(欲)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다. ‘나는 x를 하고 싶다’로 표상되는 욕망은 니체의 ‘힘에의 의지’ 개념과 맞닿아있다. 니체는 모든 의지의 근원이 힘에의 의지라고 보았고, 이 생각은 현대 사회 사상에서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언명에 기반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는 말은 갈등론자의 논거로 주로 사용되는 듯하지만, 나는 이 언명을 다르게 해석해보고자 한다. ‘모든 것이 정치적’에서 ‘것’을 욕망(의지)으로 두고, ‘정치적’을 욕망(의지) 간의 상호작용으로 본다면, 오히려 해당 언명은 오히려 가치 중립적이며, 자아가 없는 의식에 가깝다.
욕망이 고자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 식색(食色)의 욕구에 한정된다면 사회는 식색의 욕구를 두고 벌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욕구는 식색의 욕구에 불과하지는 않다고 본다. 인간은 타인의 인생을 비극으로 만드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비극에 슬퍼할 줄 아는 존재이다. ‘나는 x를 하고 싶다’에서 x의 자리에 ‘타인의 아픔을 나누고, 함께 걸어가기’를 대입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욕구의 기저에는 식색의 욕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의지-상호작용의 층위를 무한소로 쪼갰을 때 드러나는, ‘차이 그 자체’로서의 일의성은 결코 식색의 욕구로 일반화될 수 없다. 위와 같은 논리로 본다면, 식색의 욕구 기저에도 비(非)-식색의 욕구가 있을 수 있다.
‘모든 의지에 대한, 모든 의지의 투쟁’이 반복되는 영원회귀 속에서 선별되는 의지는 반복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반복은 일반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역동성’을 지닌다. 내재성의 판(field)에서 이 의지는 저 의지로 넘어가면서 운동한다. 여기서, 들뢰즈의 생각을 빌리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들뢰즈가 말한 ‘일종의 지복(至福: 지극한 행복)’을 영위하면서 사는 삶이 비극 속에서 희극을 보는 삶이지 않을까?
그의 삶과 죽음 사이에 하나의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과 유희를 벌이고 있는 하나의 삶의 계기인 것이다. 그 계기 속에서 개인의 삶은 하나의 순수한 사건을 내적이고 외적인 삶의 우연적 사건들, 즉 일어난 일의 주체성과 객체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는 비인격적이면서도 특이한 삶을 따르게 된다. 이 삶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또한 일종의 지복을 획득하는 ‘호모 단툼’(지고한 인간)의 삶이다. 이 삶은 더 이상 개별화의 이것임이 아니라 특이화의 이것임이다. (중략) 작은 아이들은 온갖 고통과 약점을 통해 순수한 역능과 지복의 내재적 삶을 부여받는다.
- 질 들뢰즈, "내재성 : 하나의 삶" -